기업들의 고질적인 담합행위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 년 동안 제품가격을 담합해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기업들에게 많게는 수 백억원의 과장금 철퇴를 가하는 공정위를 그래서 '경제검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정위가 담합행위를 적발하고 처벌하는 과정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다. 여러 기업들과 섞여 '담합라인'을 구성했던 기업 중 일부는 처벌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업들은 담합사실을 자진해서 고발한 업체에게는 과징금을 깎아주거나 추가조사를 면제해주는 '리니언시(leniency)'라는 제도의 수혜자들이다.
물론 담합라인에 가담해 소비자 등에게 피해를 준 기업을 봐주는 것이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찜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정위 입장에서 리니언시 제도는 매우 요긴한 제도다. 리니언시 제도는 무엇이고, 또 왜 생겨난 것일까.
□ "고자질하면 봐준다"-리니언시란? = 리니언시는 자진신고시 처벌을 감면해주는 '특례'제도다. 쉽게 말해 나쁜 짓을 했지만 함께 나쁜 짓을 한 친구들을 고자질(?)하면 공로를 세운 점을 인정, 일정부분 처벌을 면제하는 혜택을 주는 것이다.
자수를 유도하는 장치인 셈이다. 리니언시는 소비자 보호를 목적으로 지난 1978년 미국에서 최초로 시행됐으며, 우리나라도 지난 1997년부터 이를 벤치마킹해서 시행 중이다.
같은 업계에서 자진신고가 중복될 수도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1순위로 자진신고한 기업은 과징금 전액을 감면해주고, 2순위 자진신고 기업은 50%를 감면해주고 있다.
특히 1순위 자진신고 기업에는 과징금 감면에 더해 공정위 조사에 협조, 담합행위를 밝혀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측면에서 향후 검찰고발 등 추가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는 특례도 주어진다.
□ 카르텔 적발, 리니언시 의존도 높아 = 국내외를 막론하고 카르텔을 적발하는데 리니언시가 기여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다.
제도를 처음 시행한 미국의 경우 1997년~2004년까지의 기간동안 담합 기업에 부과한 총 20억 달러의 벌금액 중 90%정도가 리니언시에 의해 적발된 금액이며, 1996년부터 제도를 도입한 EU(유럽연합)도 해마다 40여건씩 이를 통해 담합을 적발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리니언시에 의한 기업담합 적발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
지난해 공정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5년 이후 담합으로 적발된 총 136건 중 62건(45.6%)이 리니언시를 통해 혐의가 포착됐고, 담합 관련 과징금 부과액 9254억원 중 6358억원(68.7%)이 리니언시가 적용된 사건이다.
담합조사에서 리니언시가 적용된 비중은 2005년 33.3%(21건 중 7건), 2007년에는 41.7%(24건 중 10건), 2008년에는 48.8%(43건중 21건)로 점차 증가하다가 2009년에는 80.9%(21건 중 17건)로 급증했다.
□ 리니언시 수혜자…업계 상위권 업체들 '즐비' = 취지도 좋고, 실적도 좋지만 리니언시는 장점과 함께 적지 않는 문제점을 함께 갖고 있다. 담합으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대형 업체들이 고자질을 통해 혜택 마저 부여받고 있기 때문.
죄질이 나쁜 기업들도 자진신고만 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는 '탈출구'를 정부 스스로 열어놓은 것이다.
지난해 컴퓨터 브라운관(CDT) 관련 국제카르텔 사건에서는 총 262억원의 대규모 과징금이 부과됐지만, 당시 시장점유율 32.3%로 업계 2위였던 LG필립스디스플레이는 한푼의 과징금도 내지 않았다. 1순위 자신신고 사업자였기 때문이다.
최근에 적발된 전선업계 담합의 경우에서도 565억원 과징금 중 340억원으로 가장 많은 과징금을 부과 받은 LS전선이 검찰고발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아 1순위 자진신고 사업자일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과징금도 면제받는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 공정위 "리니언시, 긍정적인 측면 더 많다" = 이 같은 리니언시 제도의 태생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이유는 긍정적인 장점 또한 적지 않기 때문.
가장 큰 장점은 공정위 조사를 통해 찾기 어려운 담합흔적을 자진신고를 통해 쉽게 적발할 수 있다는 것. 기업들의 자진신고는 암묵적인 업계의 룰을 통해 자행되고 있는 담합 적발에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리니언시의 또 다른 긍정적인 면은 '자체정화' 기능이다.
한 기업의 자진신고로 인해 해당 업계에 거액의 과징금 등 제재조치가 내려질 경우, 담합했던 기업들 상호간에 신뢰가 손상, 담합 재발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다는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한번 자진신고로 제재가 가해진 업계에서는 또다시 누군가 신고할 것이 두려워 담합이 일어나기 어렵다"며 "일부 단점도 있지만, 장기적인 공정거래 확립차원에서 꼭 필요한 제도"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