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사바주, 보르네오섬 북부해안 어귀에는 제주도의 1/20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 '라부안'이 있다.
고무와 과실류가 주산지인 작은 섬이지만 1000여개의 한국 기업이 3600여개의 현지법인이나 지사를 설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남미의 대서양 내해인 카리브해에 있는 영국령의 '케이먼군도'는 더하다.
해양스포츠 천국이자 세계적인 휴양지로 알려진 섬이지만 이곳에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의 은행과 보험회사, 자산운용사를 포함해 8만여개의 현지법인이 설립돼 있다.
어떻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수만 개의 기업이 있을 수 있을까. 바로 이들 현지법인 대부분이 직원 한 명도 없는 서류상의 회사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른바 '페이퍼컴퍼니'(paper company)다.
기업들이 이런 외딴 섬에 서류뿐인 현지법인을 두는 이유는 딱 하나 '세금' 때문이다.
세금이 없는 해외의 섬나라에 서류상의 회사를 차려 놓고, 실제로 영업을 하고 투자를 한 것처럼 회계처리를 해서 본사에서 낼 세금을 피하는 것이다.
이런 섬나라들을 '조세피난처'라고 하는데, 조세피난처에서는 기업이나 개인의 소득에 대한 세금이 없거나 아주 낮을(발생소득의 15% 이하) 뿐만 아니라 정보도 공개하지 않아서 비자금이나 탈세가 활개를 친다.
오죽하면 해외에서도 '택스 해븐'(Tax Haven), 택스 파라다이스(Tax Paradise) 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때문에 세계 각 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등을 통해 이들 조세피난처를 탈세의 온상으로 규정,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조세정보 공개를 촉구하고 있다.
라부안을 비롯해 케이먼군도, 마샬군도, 버진아일랜드, 버뮤다 등 40여개국가와 지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근 재벌닷컴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의 30대 재벌기업이 조세피난처에 주소를 두고 있는 계열사만 231곳에 이른다. 이들 기업이 해외에 두고 있는 전체 계열사의 12.7%에 달했다.
900억원대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최근 검찰에 기소당한 한 봉제인형회사 대표의 이야기는 조세피난처를 활용한 탈세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조세피난처에 서류상의 회사를 세워 비자금을 만든 다음, 그 돈을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했다.
성실한 납세자들은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다행히 최근 과세당국의 움직임은 조세피난처를 통한 탈세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방향이어서 기대해 볼만하다.
국세청이 올해부터 역외탈세전담팀을 운영하고 있고, 최근에는 관세청, 금융감독원, 금융정보분석원 등과 합심해서 '역외금융협의체'를 설립,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탈세를 적극 차단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