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근 7박 8일간 중국 방문 의미와 결과를 놓고 갖가지 추측과 진단이 무성하다.
공식 보도 내용이 제한돼 있고, 북한과 중국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수집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세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중국방문을 전후해 흘러나온 단편적인 말들을 끼워 맞춰 이런저런 짐작을 하는 분석 아닌 분석이 고작이다.
'북·중 간에 경협을 놓고 이견이 컸다', '북핵 문제에 대해선 김정일 위원장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에서 진전이 없었다', '언제까지 비밀리 중국방문이 통할까. 중국은 갈수록 밀행이 어려워지는 나라가 되고 있고, 북한에 대한 특별대접도 점차 허물고 있다'는 등등 방중 의미를 깎아내리는 풀이들도 적지 않다.
김 위원장의 방북은 작년 5월과 8월에 이어 세 번째다. 다른 무엇보다 불과 1년 사이에 세 번째 중국방문이고, 그것도 열차로 6000㎞의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다.
김 위원장의 방중은 북한의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을 해결하고 후계구도를 안착시키는 등 정치·경제적 현안을 해결하려는 데 주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방중을 통해 북·중 간 공고해진 혈맹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하려했고 그 점에서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 정상회담 시기에 맞춰 북·중 우호관계를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매개로 6자회담 복귀 등의 관심사를 남·북한 정상에 전달하는 모양새도 취했다.
중국은 김 위원장을 초청함으로써 북한에 유일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국제사회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강압외교를 지양하고 6자회담 등 대화에 나서도록 설득하고 있으니 한·미 등 국제사회도 북한에 압력과 제재 대신 대화에 나서라는 메시지를 아울러 던진 셈이다.
김정일 위원장 스스로 7박 8일간 열차로 무려 6000㎞를 달리며 자신의 건재함과 북·중 밀착관계를 과시하는 정치적 쇼를 연출했다. 중국 북쪽 지린성 창춘에서 남쪽 장쑤성 양저우까지 1945㎞를 29시간 동안 달리며 김일성 주석의 양저우 노선을 답습했다. 아버지를 내세움으로써 중국에 대해 북·중 전통 우의를 되새기게 했다.
또한, 아들에겐 철저하게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김정은 후계구도를 기정사실화하고 중국의 이해와 지지를 은연중에 주문했다. 진정성 여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6자회담 재개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밝혀 일단 한·미와 국제사회에 '대화와 평화'의 제스처도 던져보였다.
핵심의제는 역시 경제난 해결을 위한 경제협력 문제였다. 원자바오총리 스스로 일본 도쿄에서의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발전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자신들(북한)의 발전에 활용하기 위한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초청했다"고 설명했을 정도다.
후 주석을 비롯한 중국 수뇌부의 김 위원장 방중 초청이 북·중 경협을 통한 북한의 변화에 맞춰져 있음은 쉽게 읽혀진다. 김 위원장 또한 대남, 대미 관계의 개선 전망이 극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생존전략으로 중국과의 경제협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중국과의 경협을 통한 성과 창출은 김정은 후계 구도의 조기 정착을 위해서도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고 이런 정책전환은 여러 분야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금, 은, 동, 아연 등 공식적으로 수출이 불허됐던 전략 광물에 대한 해외 반출을 작년 말부터 허용하기 시작했고 중국 측과 '라선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 위화도 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관리에 관한 협정'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올 들어 북·중 교역량은 급증했고, 경제협력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북한이 이 같은 대규모 투자를 받아들일 비즈니스 환경을 아직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현재 북한은 인프라가 열악하고, 시장경제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궁여지책으로 경제특구로 조성 중인 라선특별시와 황금평 경제지대에 개성공단에 적용되는 것과 유사한 시장경제제도 도입을 고려 중이고 중국기업들이 요구해온 북한과의 합작·합영 기업에 대한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기는 계획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에 경계심을 드러내던 북한이 어쩔 수 없이 중국 측 요구사항을 하나씩 수용해나가기 시작했고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은 이런 과정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리라는 전망이다. 이는 정치·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를 더욱 심화시키고 남북관계 교착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 뻔하다.
북한 최고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는 엊그제 발표한 대변인성명을 통해 우리정부와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것이며 동해 군(軍) 통신선을 차단하고 금강산지구 통신연락소도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그럴 경우 우리가 기다려 온 남북대화→북미접촉→6자회담 재계의 3단계 시나리오도 물 건너간다.
북한은 최근 들어 한·미 동맹 전력이 강화되고 있는데 대해 불안을 느낀 나머지 세 차례 방중에서 중국에 최신예 전투기 등 무기지원을 요청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 위원장은 중국 카드를 이용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서 기선을 잡으려는 정치적 게임을 지속할 것이고, 필요에 따라 미국에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미사일 발사나 3차 핵실험 등 긴장을 고조시키는 정책을 재개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북·중 관계의 밀착화와 그로 인한 동북아 및 한반도 역학관계의 변화 조짐을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다. '북한이 경제난에다 식량난으로 다급해지면 우리에게 손을 내밀게 될 것', '적대적인 일만 하지 않고 앉아서 기다리는 게 상책', '일관된 대북정책 하나만큼은 MB(이명박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을 만하다'는 등등 자못 여유마저 엿보인다.
앞문은 닫아걸어도 뒷문은 슬며시 열어놓는 것이 국가 간 외교다. 상대방이 사죄하고 굴복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진정성을 갖고 그런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다.
남·북 비핵화 회담과 6자회담의 진전 여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개선에 달렸다. 물꼬를 트려면 민간차원의 인도적 대북지원을 늘려 상호신뢰 분위기부터 조성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중국의존도 심화 내지 종속화는 남·북한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경제협력을 분리해 접근하는 정경분리 원칙을 도입하고 개성공단사업 지원책 강화 등으로 남북경협 위축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고개를 든다.
대북압박을 하더라도 북한을 지나치게 고립상태로 방치해선 안 되며 식량지원은 정치적 이슈와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고 미국관리들마저 우리정부와 인식차이를 드러내는 상황이다. '강 건너 불'이 어느 날 졸지에 '발등의 불'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