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를 끼웠지만, 파열음이 만만치 않다. 논란을 예상했지만, 방향도 예측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파열음의 진원지도 다양하다.
복잡한 역학구도로 인한 공천 과정의 어려움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새누리당이 최근 발표한 1차 공천 심사 결과와 그 파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 친이계 '학살의 추억', 나 떨고 있니?
새누리당은 지난 27일 약 열흘간 공천심사위원회가 고심을 거듭한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서 공심위는 단수 후보로 공천에 참여한 총 32개 지역 중 21곳에 대해 공천자를 확정, 발표했다. 또 22곳에 대해서는 전략지역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단수 후보 공천지역 중 11곳에 대해서는 전략지로 선정하거나 후보 검증이 더 필요하다며 입장을 유보했다.
논란이 일었다. 정치인에게 있어 선거라는 것은 '정치적' 생명을 얻을 절호의 기회다. 당사자들의 속은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반발도 있었다. 생명과 같은 공천권이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항의 표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어찌보면 비교적 봐줄 만한 풍경 중의 하나다.
발표 당시 새누리당에 불어 닥친 논란과 반발, 그것은 탈락자들의 항변이 아니라는데 오히려 심각성이 있어 보인다.
꼬일 대로 꼬인 세력간 역학구도가 논란의 주요 원인이다.
그렇다면 최근 발생한 잡음의 실체를 들여다보기 전에 논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현행 새누리당의 세력구도를 간단히 살펴보자.
새누리당으로 대표돼온 이른바 여권에는 오랜 기간 지속된 명문(?) 계파들이 있다. 정권 내내 세력의 주류를 점하며 정부 요직과 당권을 독식해온 친이명박계, 이름하여 '친이계'. 그리고 이에 비해 수적 열세와 실권 상실로 인해 비주류의 멍에를 써온 친박근혜계, '친박계'가 있다.
문제는 이들이 이미 정권이 출범하기 이전부터 심각한 갈등을 연출하며 사사건건 충돌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정권 출범 이후까지 이어지면서 주류와 비주류라는 세력구도를 형성하며 반목을 거듭하는 배경이 됐다.
더욱이 양대 계파는 자파 세력의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극심한 충돌을 벌였던 사례도 있다.
정가에서 의구심을 거두지 않은 것도 바로 이점이다. 여의도 정치권의 전통적 대립구도가 기존 여야였던데 비해,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전후해 드러난 여여 갈등은 모양새로만 봐서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일러 '한 지붕 두 가족' 혹은, '앙숙'이라 부르며 권력 내부의 계파간 세력전을 주시해 온 것도 이례적 대결구도에 따른다.
양대 계파의 충돌도 여느 반대 정파들의 파괴력을 능가한다는데 이견이 없다. 세종시와 미디어법은 여권 내부에서 정권의 발목을 잡은 대표적 사건이다.
'이명박 對 박근혜'라는 대립구도는 현행 정치권에서는 마주 달리는 평행선처럼 여겨지기에 충분하다. 또 이들 사이에는 어지간해서는 씻길 것 같지 않은 앙금이 있다.
◇ 이재오 쇄신론, 물갈이 명분 쌓기(?)
그럼 이쯤에서 지난 27일 공천 결과에 따른 파문의 일면을 살펴보자. 공심위가 단수 후보 중심의 공천 결과를 비상대책위원회에 보고했다. 비대위가 현행 새누리당의 지도부인 만큼, 의결은 필수.
그런데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비대위 내부에서 이견이 생긴 것. 이유는 간단하다. 공위심위에서 공천자로 확정한 이재오 현 의원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김종인, 이상돈 위원이 정권실세 퇴진론을 들어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비대위가 열리던 당시 또 하나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공천 심사를 주관해온 정홍원 위원장이 비대위가 열리던 시간, 독자 행보를 통해 공천자를 발표해 버렸다.
반면 비대위는 공심위의 결과에 재심의를 요구했고, 마라톤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로써 이재오 의원은 기존 지역구인 서울 은평(을)구에 새누리당 국회의원 후보로 최종 낙점됐다. 다소의 소란이 있었다고는 해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리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시간이지만 이재오 의원은 그간의 정권 실세라는 별칭이 보여주듯 심각한 이미지 손상을 입었다는 분석이다. 이는 비대위가 공심위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소위 '정권 책임론'을 들고 나온 점이다.
이 의원이 이명박 정부의 주류인 친이계 좌장으로 불려온 만큼, 그를 향한 공세는 곧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설명이다.
이일로 친이계는 당혹감에 사로잡힌 눈치다. 마치 이 의원을 재물로 당내 친이계에 대한 반발 기류를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는 듯한 미묘한 흐름이 감지됐다.
일부에서는 이번 이재오 쇄신론이 향후 계속될 공천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드러냈다. "현 정부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 "책임이 이 의원에 있나?" 친이계 내부에서 터져 나온 말들이다.
정권 창출의 공신으로 한때 친이계 핵심으로 불렸던 정두언 의원조차, 당의 공천 과정이 "공포스럽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도 어수선하다.
굳이 친박계 중심의 당권체제에서 친이계 좌장의 공천을 두고 논란을 빚은데는 친이계에 대한 정치적 책임 전가 외에 별도의 사정이 있다. 이를 쉽게 풀어 말하자면, '괘씸죄'다.
그럼, 다시 친이계와 친박계가 서로의 등에 칼을 들이대던 2008년으로 돌아가 보자. 때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기, 친이계의 파죽지세는 친박계의 전통 세력을 일거에 누르며 당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이어 친박계에 대해 듣기에도 섬뜩한 이른바 '공천학살'로 불리는 대규모 물갈이를 단행한다.
친박계 좌장이던 김무성 의원 등이 대거 낙천의 고배를 마시며 결국 일부는 무소속으로, 또 일부는 친박연대(미래희망연대 전신)로 총선을 치르게 됐다.
당시 공천을 진두지휘한 이방호 사무총장은 친박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돼 안방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박근혜 위원장도 전면에 나섰다. 자파 세력의 존폐가 턱밑에 닥치자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이명박 정부와 주류 세력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로부터 박 위원장의 세력 재건은 탄력을 받았지만, 반대로 친이계는 심각한 도덕성 위기에 빠졌다.
비대위와 친박계가 이재오 의원을 두고, 설왕설래를 거듭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의원을 친이계 아이콘으로 바라보며, 세력 실세들의 용퇴론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일면 포용력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 논란을 지켜본 전문가들의 말이다.
◇ 박심(朴心)은 어디 있나?
당사자인 이 의원의 반응도 여러 의혹을 낳게 하는 불씨가 되고 있다. 그는 공천 확정에도 불구, 결과에 대해 일체 함구하며 "공천과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겠다"고만 말했다.
일각에서는 자칫 불똥이 다른 친이계 후보들로 옮겨 갈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공천자 발표 당일, 박 위원장이 보여준 입장도 향후 사태를 더욱 주목하게 하는 대목이다. 대규모 물갈이를 위한 '명분 쌓기'라는 시각 외에 당의 존립을 우려한 '달래기'라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해 김종인 위원도 박 위원장의 입장을 들어 '모호하다'라든가, '(박 위원장의 속내가)공천위와 같을 것'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 의원이 지난 주류를 대표하는 거물이라는 점에서 공심위 결과에 박심(朴心)이 실렸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그 속뜻은 더 궁금해진다.
물갈이를 예고하며 쇄신에 칼을 들었던 당초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쇄신의 규모와 상패가 총선의 승부를 가를 것이라는 시각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박 위원장이 실제로 친이계를 포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럴 경우, 지난 '학살의 추억'을 되새기는 친이의 제발 저리기가 된다. 하지만, 박 위원장으로서도 향후 정치 일정에 비춰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상징성을 감안해 선별적 생존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다. 머리는 남겨두는 대신 손과 발을 자르는 모양새다.
이제 겨우 첫 발표가 던진 파장의 크기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친이계와 친박계의 입장이 지난 18대와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