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4․11 총선 최대 이슈 중 하나로 떠올랐다. 정부 여당 및 범야권과 제주특별자치도의 이해가 얽히고, 선거정략과 '안보프레임'이 덧씌워지면서 사회갈등 또한 증폭시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MB)은 엊그제 주요언론사 편집보도국장과의 토론회에서 해군기지 반대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와 함께 사실상 이념투쟁으로 규정했다.
구럼비바위와 강정마을을 지켜내자는 시위가 날로 격화되고, 자연유산을 파괴하며 군사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MB정권과 해군당국을 '해적'으로 빗대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제주기지건설이 동아시아 불안정을 높이고 평화의 섬을 파괴한다며 범야권과 종교계 인사들이 서울에서 대규모 촛불시위를 기획하고, 보수단체들이 이들을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려는 종북(從北)세력으로 규탄하고 나서는 등 갈수록 이념대결의 양상을 띄어가고 있다.
그러나 해군기지건설 논란을 이념대결로 덧씌우기 전에 그 갈등의 본질을 냉철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제주해군기지는 국책사업이라며 그 필요성을 인정해 오던 제주특별자치도가 공사정지명령을 예고하며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구럼비 발파 작업에 앞서 제주도지사와 도의회 의장, 여야의 도당위원장이 한목소리로 '공사 일시보류'를 요청을 했지만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발파 작업을 시작했다.
발파 강행이라는 정부의 강수(强手)에 제주도는 '공유수면 매립공사 정지'라는 최후카드를 꺼내들며 오는 20일 청문절차에 응하라고 해군에 요구했다. 해군이 청문에 불응하거나 소명이 부족할 경우 즉각 공사 정지 명령을 내릴 기세다.
제주도의 의도대로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정지되면 해상공사가 불가능해 기지건설일정은 큰 차질을 빚는다.
하지만 정부는 도가 정지 명령을 내리더라도 공사 계속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어서 실제 공사가 중단될지는 미지수다.
정부가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저항을 무릅쓰고 공사를 강행하는 실로 보기 드문 모양새다.
정부가 이처럼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될 경우 해군기지 추진이 영영 어려워질 수 있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민주통합당은 해군기지 공사 중단 및 원점 재검토를, 통합진보당은 해군기지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놓은 터다.
우근민 지사는 지난 2010년 7월 취임 이후 줄곧 정부와 도민이 윈윈하는 방향으로 해군기지 문제를 풀어나가겠다고 다짐해왔다.
국책사업인 해군기지 건설을 받아들이는 대신 사업예정지인 서귀포시 강정마을 등의 지역발전도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윈윈 해법이 해군기지와 함께 15만톤급 크루즈선박의 자유로운 입출항이 보장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이었다. 이는 MB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관광미항보다는 해군기지 건설에만 '올인'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MB는 지난 2월 취임 4주년 회견에서 민군복합항은 언급도 없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필요성만 강조했고, 같은 달 김황식 국무총리는 '오지도 않는 크루즈 선박 때문에 불필요한 논란만 계속하고 있다', '예산 낭비라는 주장도 있다'고 토를 달았다.
속을 끓이던 제주도는 지난주 "제주기지는 분명히 해군기지다. 다만 해군기지를 만들면서 크루즈선도 계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는 국방부 대변인의 발언이 나오자 "15만톤 규모의 크루즈선이 입·출항할 수 있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은 정부가 직접 국민에게 발표하고 도민에게 약속한 사안"이라고 즉각 반박자료를 냈다.
크루즈 선박의 입출항을 위해 제주도는 항만 선회장의 직경과 항로의 안전성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며 풍속과 횡풍압 면적 등의 기준을 제대로 적용해 시뮬레이션을 다시 하도록 정부에 요구했다.
정부는 지난 2월 29일 국가정책조정회의를 통해 "국방부가 지난해 12월에서 올해 2월까지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결과 크루즈선 입출항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며 해군기지 건설 강행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과정에 제주도가 추천한 전문가들은 배제됐고, 제주도는 "시기상 기술검증위원회의 의견이 반영됐는지도 의문이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공사강행 발표 하루 전에도 정부에 공문을 보내 "제주도와 해군이 함께 참여하는 시뮬레이션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추가 시뮬레이션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나면 강정마을회를 설득해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에 대한 주민총회를 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정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구럼비 해안가 발파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했다. 제주도와 도의회, 지역 정치권의 의견을 묵살한 정부의 밀어붙이기가 제주도지사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셈이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국책사업인데도 정부 책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제주도에만 문제 해결을 떠넘겨왔으며, 주민들이 대화를 요구해도 '반대는 있기 마련'이라며 정부 책임자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는 불만들도 꼬리를 문다.
기지건설 논란이 정치적 쟁점으로 뜨거워지면서 정부와 지자체 및 주민간의 이런 소통부재 즉 '불통(不通)'은 묻히고 선거정략과 그에 편승한 이념 대결이 논란을 주도하며 국론을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이의제기도 이념투쟁의 일환이라는 얘기인가. '평화의 섬' 제주도에 군사기지건설이 적합한가를 놓고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미국과 중국 간에 긴장이 고조됐을 때 제주해군기지가 한미관계, 한중관계에 갈등을 불러올 소지가 있다는 우려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구럼비해안의 생태 ․ 환경적 가치에 대해서는 군과 환경단체의 견해가 엇갈린다.
어차피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중요한 것은 갈등의 조정이고, 이 중요한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정부와 군당국이 얼마나 지자체 및 주민과 소통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노력을 했느냐는 점이다.
기지건설 방향을 놓고 정부 태도는 지금도 아리송하다. "지구상에 15만톤 이상이 6척뿐인데 갑자기 2대가 동시에 올 일이 없으니 계획 자체는 잘못됐다. 그러나 해군기지를 하기 위해 약속을 했을 것이므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지난주 대통령의 어정쩡한 설명을 제주도민과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마저 이런 본질적 '불통'문제는 제쳐두고 '당리당략에 따른 무책임한 말 바꾸기'로 대야공세에만 주력하는 모습이다.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다. 이전의 정부가 결정한 사항도 문제가 드러나면 이를 고쳐야 한다. '말 바꾸기'나 색깔론으로 몰아치며 총선을 이념대결의 안보프레임으로 끌고 가 정치적 이득을 노린다면 이야말로 '수구꼴통의 구태정치'가 아니고 무엇이랴.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