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8월12일 밤 9시. 전국에 생중계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특별담화문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을 빌어,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를 발표한 것입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 금융실명제는 '반쪽짜리' 제도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기명, 가명계좌 사용만 금지하고 있을 뿐 타인과 합의 시 차명계좌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명계좌 때문에 과세당국은 '골탕'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분명 증여로 의심되는데도 불구, "이건 차명계좌일 뿐 실제로는 내 돈이다"라고 해명하면 과세권을 행사하기 어렵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과세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얌체족들을 막기 위해 차명계좌를 원천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여전히 제도 개선은 되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차명계좌를 활용한 세금회피가 모든 경우에만 성사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허술한 계좌관리가 빌미가 되면서, 세금을 두들겨 맞은 다음의 사례가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 "이 통장은 차명계좌일 뿐입니다" = 마산에 거주하는 A씨 명의 통장에 수상한 거래가 있음을 포착한 마산세무서는 지난해 A씨에게 해당 금액을 증여 받은 돈으로 간주, 일정액의 증여세를 부과했습니다.
총 4차례에 걸쳐 A씨의 통장에 입금된 돈은 사위인 B씨 이름으로 보내진 돈이었습니다. 즉 일반인들의 상식과 달리(?) 사위가 장인에게 재산을 증여한 꼴인 셈.
하지만 A씨는 자신은 돈을 증여 받은 사실이 없다고 강변합니다. 사위가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명의를 빌려 통장을 개설, 돈을 이체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A씨는 "해당 통장에 들어있는 돈은 증여 받은 재산이 아니다. 증여세를 부과한 마산세무서의 처분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조세심판원에 심판청구를 제기했습니다.
마산세무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산세무서는 "A씨가 세무서 조사 이후, 만기된 통장을 해약한 뒤 다시 예치하는 등 여러 객관적인 정황으로 비춰볼 때 차명계좌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강조했습니다.
□ 심판원, "차명계좌로 볼 수 없다…세금 내라" = 조세심판원은 해당 사건에 대한 심리를 진행한 후 국세청의 과세권 행사는 정당하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런 저런 상황을 종합하면 차명계좌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심판원 결정의 근거였죠.
심판원은 결정문을 통해 "사위 명의 예금이 인출, A씨 명의 계좌로 예치된 사실이 밝혀진 이상 해당 예금은 증여된 것으로 추정된다"라며 "설혹 증여가 아닌 다른 목적의 예금 이체였다면 입증책임은 납세자에게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심판원은 이어 "하지만 A씨가 세무서 조사 이후에도 자신 명의 통장을 만기 해약한 뒤 다시 예치하고, 해당 통장에 대해 사위인 B씨 등이 실질적인 지배 및 관리권을 행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증빙자료가 없다"며 "과세가 부당하다는 A씨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강조했습니다.
국세청에 따르면 너무도 당연한 과세권 행사가 차명계좌를 허용하고 있는 금융실명법의 '함정'에 빠져 납세자와의 다툼으로 번지는 사례는 이외에도 수 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전언입니다. 정당한 세금을 받아내기 위해 '헛심'을 쓰는 것은 분명 잘못된 처사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차명계좌를 원천 금지해 금융실명제를 바로 세우고 국가의 정당한 과세권을 확보하고, 행정력을 낭비하는 사례를 막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심판례 : 조심2012중11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