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만루 수비상황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수비를 튼튼히 해서 실책을 줄이겠다. 잔루가 많다는 것은 좋지 않다. 모든 작전을 동원해 주자들을 홈으로 불러들이겠다."
언뜻 보면 하위권을 맴도는 프로야구 구단 감독의 인터뷰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야구 용어가 즐비한 발언을 쏟아낸 주인공은 야구 감독도, 선수도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박 장관은 열혈 야구팬들이 많기로 소문난 경남 마산 출신의 야구광으로서, 롯데 자이언츠의 골수 팬. 평소에도 잦은 야근 이후 늦은 밤에도 야구경기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은 꼭 챙겨본다는 그는 야구 관련 지식 또한 해박하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책학 석·박사 학위를 획득한 박 장관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을 야구 경기 중 특정 상황 또는 해외 유명 야구선수 및 감독들의 발언에 빗대 풀이한 '베이스볼 경제학'을 구사, 주목을 끌어 왔다.
하지만 MB정권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현 시점까지 박 장관이 펼쳐온 '베이스볼 경제학'이 얻어낸 성과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만한 수준이 아닌 형편이다.
◆ MB정부 '멀티플레이어', "중간계투·유격수·포수까지"
박 장관은 기획재정부 장관에 취임 이전인 지난 2010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부터 자신의 정책운용 철학 및 의지 등을 야구에 비유해 설명하곤 했다.
노동부 장관 취임 직후 "일자리 창출이라는 빅게임에서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 중간계투가 되겠다"고 밝혔다. 임태희 前 장관에 이어 MB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일자리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난 2011년 4월에 열린 '제1차 일자리 현장점검회의'에서는 "고용부는 특급 유격수가 돼야 한다"며 노동부 직원들을 돌려하기도 했다.
안타성 타구 방향을 예측해 손쉽게 수비하는 특급 유격수처럼, 노동부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공일자리 사업 등을 선제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주문이 담겨 있었다.
일자리 정책의 중간계투와 특급 유격수를 자처했던 박 장관은 같은 해 5월 윤증현 前장관의 후임으로 기획재정부 장관에 취임했고, 경제부처 수장으로 자리를 옮긴 만큼 자신의 '포지션'을 교체했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주재한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이 회의가 경제정책이 실질적으로 조정되는 토론과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재정부는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겠다"며 "야구경기 '포수'처럼 가장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말했다.
각종 경제 사안에 대해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함은 물론, 재정부를 중심으로 내각 전체의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강화하겠다는 뜻을 이 말에 함축해 놓은 것이다.
이후에도 박 장관의 베이스볼 경제학은 계속됐다. 지난해 6월 2012년도 예산편성·심의를 앞둔 상황에서 "구속을 1km/h 늘리는 것보다 제구력을 1cm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재정건전화 및 균형재정을 목표로 내세운 정부가 예산을 무작정 늘리기보다는 적재적소에 투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특히 MB정부의 '순장조'라고 불리는 박 장관은 현 정권의 마지막 경제수장으로서 자신을 '마무리 투수'에 비유했다. 유로존 재정위기로 악화되는 국내 경제를 최대한 활성화하고,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쓰러져 가는 한국 경제를 수호하겠다는 의지 표현이다.
그는 지난해 7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장관 취임 이후 맞닥뜨린 현재의 경제상황을 야구에 빗댄다면 박빙의 리드 상황에서 '1사' 만루를 맞아 마무리로 등판했다고 생각한다"며 "역전 당하지 않고 구원하면 좋고, 최소한 홀드라도 기록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박 장관 취임 이후에도 우리나라 경제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유럽 등 선진국의 경기부진으로 수출 증가세는 둔화됐고, 내수 침체는 여전했다.
서비스업과 상용직을 중심으로 고용회복세가 이어졌지만 제조업 취업자는 감소세로 전환했고,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 고용사정은 어렵기만 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연평균 4%에 달할 정도로 서민생활은 더욱 팍팍해졌고, 경제성장률은 3.8%에 머물렀다.
박 장관도 위기를 느껴서인지 지난해 연말 재정부 1급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한국경제의 '아웃 카운트'를 변경했다. 그는 "최근의 상황은 '무사' 만루의 수비상황과 같다"며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 계속되는 위기, "실점하진 않았다(?)"
올해 들어서도 우리나라 경제의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유로존 재정위기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졌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지정학적 리스크마저 급상승했다.
실제로 정부는 2012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며 올해 경제성장률을 지난해보다 낮은 3.7%로 전망했다. 이 같은 위기가 계속되자 박 장관도 연초부터 과감한 경기 부양책보다는 금융·외환 등 한국경제의 취약부문을 보완하는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올해 3월 자신의 페이스북 친구들과 갖은 간담회에서 "현재 실점 위기에 있어 공격이 아닌 수비를 하고 있다"며 "결정적으로 패스트볼(passed ball, 실책)을 했다거나 실수를 해서 점수를 주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장관은 이후에도 여러 번 수비적인 경제정책을 강조했다. 재정부 직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야구든 축구든 빗장 수비가 강팀의 전제조건"이라며 "경제위기가 상수처럼 돼버린 요즘 아무리 막강한 화력을 갖춰도 실책이 잦으면 이기기 어렵다"고 전했다.
국제세미나 특별연설에서도 축사를 통해 "우선 수비를 튼튼해서 실책을 줄이겠다"며 "타석에서는 방망이를 짧게 잡고 스윙 궤적을 줄여 병살타나 삼진을 막고, 적어도 선행주자를 진루시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 회심의 '스몰볼' 대책, 효과는?
상당 기간 동안 수비적인 경제정책을 고수해 왔던 박 장관은 지난 5월 이후, 스스로 '스몰볼(Small ball)' 대책이라 지칭한 소규모 경제활성화 정책을 연달아 쏟아내면서 공세적인 정책스탠스를 취했다.
박 장관은 지난 5월 기업투자활성화 대책을 시작으로 일자리 대책, 5·10 주택거래정상화 방안, 서민생활 및 물가 안정 방안 등을 차례대로 발표하며, 올해 1분기 2.8%까지 떨어진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지난 5월10일 열린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기존의 발표처럼 투자활성화, 내수활성화 등 스윙 폭이 큰 장거리 타자를 타석에 내보내는 빅볼이 아닌, 번트나 도루 등을 잘하는 스몰볼 선수를 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부터 계속된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를 소규모 단타성 정책으로 극복하기에는 이미 우리경제가 까먹은 점수가 너무 많았다.
기업들의 투자는 2분기 들어서도 좀처럼 늘지 않았고, 꽁꽁 얼어붙은 주택시장도 활기를 찾지 못했다. 정부는 계속되는 경기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3.7%에서 3.3%로 오히려 깎아버렸다.
◆ "야구도 경제도 9회말 2아웃부터?", 베이스볼 경제학 '현재진행형'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이 말은 미국 메이저리그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의 살아있는 전설 '요기 베라'(Lawrence Peter Berra)가 남긴 야구계 최고의 명언 중 하나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과 함께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인용되는 이 명언을 최근 박 장관이 언급했다.
그는 지난 20일 서울시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경제정책위원회에 참석,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말과 같이 이명박 정부는 남은 임기에 관계없이 기업의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얼마 남지 않은 MB정부 임기 동안 경제활력 제고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데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경제당국 수장으로서의 다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MB정부가 들어선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계속되며 국내 경제 또한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해 글로벌 금융위기를 상대적으로 빠르게 극복, 국가 대외신용도를 높인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Moody's)가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일본·중국 등과 같은 'Aa3'로 상향조정한 것이 이를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 경기는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서민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박 장관이 지난 4월 열린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인용했던 "어제의 홈런으로는 오늘 시합에서 이길 수 없다"는 베이브 루스의 말처럼, 과거의 성취에 만족하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착실히 준비하는 경제정책이 절실한 때다.
연말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MB노믹스의 마무리 투수 역할을 수행 중인 박 장관에게 지난 5년 동안 침체됐던 경제를 살리고, 서민생활을 획기적으로 안정시킬 호쾌한 '홈런' 한 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몇 년 동안 계속된 경기위기 해소의 과제는 차기정부로 넘어갈 전망. 2013년 균형재정을 약속한 박 장관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다음 정부로 타순이 넘어간 한국경제 '리빌딩(rebuilding)'의 초석을 다져놓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