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성장률이 추락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년 전에 비해 1.6% 증가에 그쳤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성장률이 1%로 급락한 지난 2009년 3분기 이후 3년 만의 최저치다.
직전 2분기와 비교한 성장률도 0.2%에 그쳐 2009년 4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직전 분기와 비교한 성장률은 2011년 2분기(0.8%)부터 6분기 연속 1%를 밑돌아 역대 최장기간 저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성장률이 낮아도 보통 낮은 게 아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에도 전기 대비 1% 미만 저성장은 3분기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2004년 카드대란 직후에도 5분기 동안 저성장하다 이후 반등했었다.
한국 경제가 그동안 2%가 안 되는 성장을 한 것은 2차 오일쇼크(1980년 1~4분기), 외환위기(98년 1~4분기), 카드사태(2003년 2분기),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4분기~2009년 3분기) 때 등 단 네 차례 밖에 안 된다.
과거의 저성장은 리먼브러더스 파산 등 일시적 충격에 따른 것이었지만 이번엔 결정적 계기 없이 서서히, 지속적으로 경기가 가라앉고 있어 저성장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는 우려를 뒷받침한다.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우리 경제가 달성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은 분기당 1%로 추정되고 있다. 이를 밑도는 저성장이 계속 된다는 것은 우리 경제가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장기불황에 빠져 들고 있다는 의미다.
성장률 쇼크의 근본 원인은 유로존의 재정 위기와 미국의 '재정절벽'(fiscal cliff:세금은 더 걷고 재정지출은 줄이는 데 따른 부작용), 중국 경제의 둔화로 인한 세계경제의 침체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가 이미 '상수'(常數)가 된 마당에 3분기 성장률 급락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은 설비투자 부진이다.
설비투자는 지난 2분기에 전 분기에 비해 7.0% 감소한데 이어 3분기에도 2분기에 비해 다시 4.3%가 감소했다. 대내외 경제여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현금을 움켜쥔 채 투자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일은 이 같은 설비투자 부진이 앞으로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수출 증가율 역시 2.6%로 2009년 3분기(1.1%) 이후 최저다. 세계경제가 여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해 수출의 빠른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연중 최저기록을 계속 갈아치우고 있는 환율 또한 수출에 부정적이다. 달러당 원화값은 1100원선이 무너지면서 하락속도가 빨라지는 모습이다.
소비자심리는 8월부터 석 달째 부정적이다. 가계 빚은 많은데 집값이 하락하니까 '역(逆)의 자산효과'도 두드러진다. 소득은 미약하나마 늘고 있지만 빚을 갚기 위해 가계가 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내수가 부정적 영향을 받고 고용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3분기까지의 경제성장률은 2.2%다. 기획재정부는 올 경기 흐름을 '상저하고'(上低下高)로 판단하고 연 3.3% 성장을 전망했었다. 그러나 한은이 대폭 내려잡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 2.4%마저 달성이 불투명하다. 2.4%를 달성하려면 남은 4분기에 2.8~2.9% 성장해야 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래도 내년 경제가 올해보다는 나을 것이란 기대를 접지 않고 있지만 성장률이 높아질 가능성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훨씬 크고, 한국이 내년에도 2%대의 성장에 그칠 것이라는 바깥의 전망도 벌써부터 나돈다.
이 때문에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가려져 있던 성장담론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성장이 없으면 복지도 경제민주화도 어렵기 때문에 성장 동력과 국제경쟁력을 배양하면서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 분배도 개선하자는 얘기다.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최상의 복지다. 따라서 성장을 해치지 않으면서 불평등을 시정하고,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 21세기형 신성장 모델이 필요하다.
경제의 대외의존도를 줄이고 내수시장 활성화와 중소기업 회생을 통해 고용창출 능력을 높여야 지속적이고 균형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가 투자를 위축시키고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대선후보들은 성장 동력 확충과 복지확대 경제민주화 방안들과 관련해 각기 단편적인 대책들을 다투어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들을 체계적으로 묶을 수 있는 '큰 틀'과 그것을 뒷받침할 '사회적 대타협'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창조경제'(박근혜), '포용적 성장'(문재인), '개인과 기업이 함께 성공하는 경제'(안철수)를 담아낼 '그릇'이 있어야한다는 얘기다.
장기불황 가능성에 대비해 경기부양책을 대선공약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체계적인 밑그림 없이 경기부양책을 찔끔찔끔 실시할 경우 재정적자만 쌓이고 효과는 나타나지 않은 채 일본식 장기불황의 전절을 밟기 십상이다.
6명 중 1명꼴로 폐업 위기에 놓여있는 520만 명의 자영업자, 75만 명의 실업자에 대한 구체적 대책이 '발등의 불'이고, 거시적으로는 기업이 움켜쥐고 있는 현금 313조원의 투자를 유도하고, 일자리창출을 위한 외국자본 유치대책에 관한 큰 그림도 나와야한다.
대기업과 수출 위주의 성장모델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수출산업의 국내산업 연관효과가 갈수록 미약해지고, 세계화에 따른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으로 국내 산업이 공동화되면서 수출대기업과 국내 중소기업 간 격차는 날로 벌어지고 있다.
제조업의 고용창출능력이 떨어지면서 '성장이 곧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복지재원 확충을 통해 일자리창출 효과가 큰 보육, 간병, 의료 등 사회ㆍ복지서비스 부문의 사회적 일자리를 늘려 소득불균형을 완화하고 성장률을 높여나갈 필요가 있다.
저성장 시대에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 재분배를 원활히 하려면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양보와 사회적 대타협이 필수적이다. 정규직 노조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에 동참하고, 대기업은 정년연장과 임금 격차 해소에 앞장서고,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및 고용창출 기업에 세제 등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방향으로 대타협을 이루어내야 한다.
성장과 복지, 경제민주화가 서로 편을 갈라 싸울 일이 아니다. 성장을 해치지 않으면서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고, 그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키워나가는 데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