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조 종잣돈 구성부터 의문…금융당국도 '손사래'
박 당선인이 밝힌 '자활 의지' 구체적 기준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가계부채 문제 해소를 위해 제시한 핵심공약인 '국민행복기금'에 대해 우려의 시선들이 벌써부터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금융시스템 근본을 흔드는 정책'이라는 지적을 비롯해 어려운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빚을 갚아나가는 일반 서민들과의 역차별 문제, 18조원에 달하는 재원확보 현실성 등 다양한 문제점이 거론되고 있다.
박 당선인 스스로도 지난 25일 인수위 국정과제토론회에서 "(국민행복기금과 관련된)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 등은 해결해야 될 문제이고, 자활 의지를 가진 대상에게 선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어느 정도 '위험성'을 지닌 정책이라는 평가다.
□ '종잣돈' 1.8조원, 어디서 끌어오나? = 18조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종잣돈(seed money)은 기금의 10%인 1조8000억원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새누리당과 인수위 측은 이 돈을 기반으로 민간금융기관에 채권을 발행, 18조원의 재원을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조8000억원의 종잣돈은 기본적으로 현재 운영 중인 신용회복기금과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의 부실채권정리기금 위주로 조성될 전망이다.
나성린 새누리당 정책위 부의장은 29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 "신용회복기금이 보유 중인 현금과 연채채권을 합친 8700억원, 캠코가 보유한 부실채권정리기금 잉여금 3000억원, 캠코 고유계정 차입 7000억원을 통해 재원을 마련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재원조성 계획을 설명했다.
대략적인 수치는 맞췄지만, 이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인지에 대해선 금융당국조차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캠코가 운영 중인 부실채권정리기금을 국민행복기금으로 전용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민 혈세로 조성된 공적자금 성격의 부실채권정리기금을 별도의 법 개정 없이 국민행복기금으로 전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판단. 이미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 (부실채권정리기금을) 국민행복기금으로 출연할 수 있겠지만, 기금 성격상 곧바로 투입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금융당국은 지난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국민행복기금 조성 문제와 관련, 부실채권정리기금을 재원으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인수위 측도 이러한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해 단계적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될 경우, 내년부터 국민행복기금이 시행된다고 가정하더라도 18조원의 기금이 곧바로 조성되기 어렵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 모럴 해저드 방지대책은 없나? = 국민행복기금이 채무자를 구제하는 시스템은 이들이 갚지 못한 장기 악성 채권을 금융권으로부터 매입한 뒤, 원리금 상당액을 탕감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일반적인 채무자는 원금의 50%, 기초생활수급자는 최대 70%까지 감면하고, 남은 부채를 8~10년 장기분할상환 방식으로 전환해서 정부가 회수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채무자의 채권상환부담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이런 방식은 사실상 신용불량자를 추가로 양산할 수 있는 근원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소득이 상당해 갚을 능력이 충분해도 고의적인 연체로 빚을 줄이려고 하는 이른바 도덕적 해이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시중은행 대출 담당자가 연체자에게 전화를 걸어 빚 독촉을 했는데 개인회생을 신청했으니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더구나 이 연체자는 증권사에 다니는 고액 연봉의 임원이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혀를 찼다.
박 당선인도 국민행복기금에서 발생될 수 있는 문제점 중 이 같은 도덕적 해이를 우선적으로 손꼽으며 "정책을 만들 때부터 '자활 의지'가 있는 분에 한해 부채감면 혜택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며 선별적인 지원방안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박 당선인이 언급한 '자활 의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판단할까.
이와 관련 나 부의장은 "캠코의 도덕적 해이 방지 제도를 원용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며 "개인 신용평가 방법이 있고 현재 자산 정도, 앞으로 어느 정도 수입이 들어올 것인가 예상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권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미 캠코는 국민행복기금과 비슷한 취지인 신용회복제도를 운영 중이다.
별도의 소득 기준은 없지만 채무자가 8~10년 분할상환 약속을 담은 '채무약정서'를 작성하면 주택, 자동차 등 채무자의 재산여부(재산보유 시 지원불가)를 판단해 지원 여부가 결정된다.
만약 채무이행 과정에서 숨긴 재산이 발견될 경우 지원 약정이 자동 폐기되고 채무액에 따라 재산 일부도 몰수되는 페널티가 부여된다. 주로 4~5년 된 무담보 신용대출 채권 등 은행권이 사실상 회수를 포기한 채권 중심으로 매입되는 실정이다.
이런 제도적 장치를 감안하더라도 일부 발생되는 문제점들은 가계부채 해소라는 대의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나 부의장은 "도덕적 해이 문제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빚 탕감을)안 해줘서 채무자들이 영원히 못 갚고 파산하게 되면 본인도 폐인이 되고 은행도 부실화된다. 채무자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라며 제도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 부실채권, 얼마에 매입하느냐가 '포인트' = 국민행복기금 운영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점은 또 있다. 바로 은행이 보유한 채무자들의 부실채권을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과연 어느 선에서 매입할 것인지 여부다.
이는 사실상 은행의 손실률 보전에 따른 '재무건전성'과 관련된 문제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일례로 금융권이 과도한 헐값에 채권을 넘길 경우, 기존 법원 파산선고에 따른 채무조정보다 손해율이 커지는 문제점이 있고, 반대로 사실상 회수 불가능한 채권을 지나치게 높은 가격에 매입해도 역으로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이와 관련 나 부의장은 "일반적인 부실채권과 같이 최대한 낮은 가격에 매입할 것"이라며 "부실채권기금의 잉여금을 정부와 금융기관에 배당하지 않고, 국민행복기금에 투입하게 되면 금융기관도 상당 부분 책임을 진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회수가 불가능한 부실채권을 최대한 싼 가격에 매입하되, 기존 부실채권기금 운영에 따른 배당수익을 최소화시켜 유동성에 큰 문제가 없게 하겠다는 얘기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국민행복기금 제도의 성공적 안착을 위해선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가장 기본적인 가계부채 문제 해결은 채무자와 채권자인 은행이 1차적인 책임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라며 "도덕적 해이 등 부작용 최소화하려면 국민행복기금이 금융회사로부터 부실채권을 매입할 때 가격 조건을 적정 수준으로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금융산업연구실장은 "인수위에서도 국민행복기금을 한꺼번에 만들겠다는 건 아닐 것"이라며 "금융회사의 손실액을 얼마만큼 상계하느냐, 기금의 설계구조에 따라 재정 투입 및 도덕적 해이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서 실장은 이어 "가계부채 문제는 일거에 해결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채무조정이 누구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느냐가 중요하다"며 "은행의 손실도 장부 가치를 얼마만큼 인정해 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