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처음으로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지명된 국무총리 후보자가 사퇴하면서 '박근혜 인사 스타일'에 대한 문제가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
그동안 '나홀로·깜깜이' 인사라는 비판에도 불구 '철통보안'을 모토로 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사스타일에 명확한 한계가 증명됐다는 지적이다.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가 박 당선인의 리더십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인사청문회를 하기 전에 후보직에서 자진사퇴를 한 것은 부동산 투기 의혹과 자녀 병역면제 의혹이 주요 원인이었다.
문제는 제기된 의혹들이 대개 등기부 등본을 비롯한 관련 서류만 떼어봐도 쉽사리 알 수 있는 사안이란데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박 당선인이 김 지명자의 서류 검증 조차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 때문에 박 당선인의 인사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측근들로 구성된 검증팀이 인사 작업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고, 이것이 허점을 드러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박 당선인이 정부와 청와대의 관련 서류 요청은 물론 인사 시스템도 활용하지 않은 사실도 드러나면서 측근 몇 명만으로 몇 십명이나 되는 국무위원 후보자들을 검증할 수 있겠냐는 우려까지 일고 있다.
□ '철통·보안 스타일' 한계 부딪쳤다? = 박 당선인의 '철통·보안 스타일'이 이번에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가깝게는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부터 하지원·윤상규 인수위 청년특위 위원과 멀게는 지난해 총선 때 진영아 전 공천위원 사례가 있다.
윤 대변인은 인수위가 꾸려지기 전, 수석대변인으로 임명됐으나 극우보수 논객으로 활동하던 시절, '정치적 창녀'라고 했던 발언과 칼럼 등이 문제가 돼 자질 논란에 휩싸였다. 대우조선해양의 사외이사로 재직한 사실도 도마에 올라 인수위 대변인으로 직을 옮기기도 했다.
하 인수위원은 지난 2008년 서울시의원을 하던 중 돈봉투를 받아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으며, 네오위즈 대표인 윤 인수위원은 하도급 업체와 불공정 거래를 체결했다는 이유로 자질 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나 박 당선인이 인수위의 인사를 차기 정부로까지 연결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천명함에 따라 기껏해야 '2달 짜리' 인수위원들에 대한 논란은 금새 수그러들었다.
김 지명자 역시 인수위원장이었지만 임명 당시 부동산 투기와 장차남 병역면제 의혹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존경받는 법조계 원로라는 이미지를 가진 2달 짜리 인수위원장에게 야당에서 굳이 정치적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현미경 검증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박 당선인이 인수위 인사를 내각으로까지 연결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깨고 김 지명자를 총리 후보로 낙점한데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인선이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언론과 야당의 현미경 검증이 시작됐다.
이런 검증 회오리 속에 김 지명자는 결국 후보직에서 사퇴했지만 그의 사퇴가 던진 파장은 인수위원과 공천위원 임명 잡음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동안 박 당선인은 불미스런 일에 연루됐던 현기환·홍사덕 전 의원, 현영희·문대성·김형태 의원을 탈당시키는 선에서 일을 처리해왔고 야당에게 '꼬리자르기'라는 비판을 받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잊혀졌다.
김 지명자의 사퇴도 이런 과정을 거쳐 잊혀질 수는 있지만, 이번 인선이 박 당선인의 첫 인사라는 점과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라는 상징성은 물론이고,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내각을 구성하는데 있어 후속 총리 인선을 빨리 해야 한다는 큰 부담감을 안겼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김 지명자의 사퇴만으로 상처받은 박 당선인의 리더십이 회복되기는 어렵다고 해석되는 셈이다.
□ 원점으로 다시…남은 인선은? = 총리 인선이 차질을 빚게 됨에 따라 박 당선인은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될 처지에 놓였다. 시간표상으로는 다음달 4일이면 장관 후보 인선까지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촉박하지만 박 당선인은 현재 총리 인선까지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다가 '인사검증'이란 문제까지 시험대에 놓였다.
총리 후보자 인선이 끝나면 보통 17명의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인선도 단행해야 하는데, 김 지명자를 지명했던 것과 같은 시스템을 가지고는 비슷한 문제가 또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에 여당에서조차 박 당선인의 인사 검증 시스템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당선인의 측근 몇 명이 모든 국무위원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더구나 총리직을 비롯한 국무위원은 인사청문회를 꼭 거쳐야 하기 때문에 후보군에 있는 사람들이 '김용준 트라우마'를 우려해 이를 쉽게 수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인원이 조직적으로 인사 작업을 진행하거나 정부나 청와대의 인사 시스템을 활용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 출범 때처럼 첫 국무회의에 참여정부 장관 3명이 참석해 개의 정족 수를 채우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