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난처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자 해외활동이 많은 기업들이 잔뜩 움추리고 있다. 해외 선진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조세피난처에 불가피하게 법인을 설립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당기업에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뉴스타파가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거나 계좌를 갖고 있는 인사들의 명단을 공개할 때마다 당사자들의 변명이 궁색한데다 과세당국이 엄중한 조사방침을 천명하고 나서자 기업들은 더욱 곤궁한 처지가 됐다.
조세피난처 관련 명단에만 올라도 비자금 조성, 재산은닉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오인받는 상황이 돼버렸다.
재계 관계자는 뉴스타파측의 리스트 공개와 관련 "이미 기업공시를 통해 페이퍼컴퍼니 설립 사실을 알린 내용까지 싸잡아 명단에 올려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만들고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
그는 "기업이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조세피난처를 활용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전제하고 "마녀사냥식으로 몰고 갈 경우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 해외 영업경쟁력 제고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가운데서도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가 더러 있다.
대형 건설회사의 한 임원은 "중동지역에서 개발사업을 하고 있는데 개발지의 토지를 유럽 등 선진 기업들이 조세피난처에 있는 법인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 회사가 보유한 토지만 따로 사들이고자 할 경우 상대방이 세금부담 때문에 아예 팔지를 않아 부득이 기업인수 형식으로 취득할 수밖에 없다"고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갖게된 이유를 설명했다.
재계는 이처럼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법인의 경우 사업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설립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자금도피나 재산은닉을 위해 설립된 법인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는데 싸잡아 비난하고 있어 곤경에 빠졌다는 것이다.
전경련은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설립한 기업들을 유형별로 나눠서 소개하고 조세피난처 문제를 우리 경제와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슬기롭게 다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해운회사가 선박 매입과정에서 설립하는 현지법인
전경련이 소개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해운회사이다.
한 대형 해운회사는 조세피난처인 파나마에 선박 1척 마다 회사 하나씩을 설립해 놓고 있다.
이 회사가 SPC를 설립한 이유는 대주사로부터 선박금융을 통해 고가의 선박 매입을 위한 차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주사들은 해운회사가 부도 등의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선박이 넘어가는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SPC를 설립해 회사와 선박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게 해운업계의 국제적인 관례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해운회사 입장에서는 선박을 직접 구입할 경우 회계상 부채로 잡혀 유동성 확보나 리스크 관리가 어렵다"며 "해외 SPC를 설립하여 선박을 보유하는 것은 대주사와 해운회사 입장에서 모두 득이 된다"고 조세피난처에 별도 회사를 설립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선박을 취득할 때 부과되는 각종 취등록세 비용은 절감하지만 해상운송수수료 수입등 영업을 통해 얻은 이익은 정상적으로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다"고 영업성과에 대한 성실납부를 강조했다.
◇ 해외법인 인수를 위해 투자펀드를 모집하는 경우
국내의 한 중견 IT기업은 작년 케이만제도에 SPC를 설립하고 기술이전을 위해 꼭 필요했던 해외 IT연구회사의 경영권을 취득했다.
이 회사가 조세피난처에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한 이유는 회사 자체자금만으로는 해외법인의 경영권을 취득하기 어려워 국제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국제 자금시장에서의 투자펀드모집은 자금모집과 투자수익의 분배에 유리한 조세피난처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투자자들도 이런 투자구조와 절차를 요구하기 일쑤다. 이 때문에 중견기업 수준에서는 조세피난처를 이용해야 그나마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회사 관계자는 설명했다.
◇ 중국의 부동산을 취득하는 사례
중국의 많은 부동산은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에 소재한 SPC가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법인이 중국에 현지공장 설립이나 사업장 개설 등을 위해 부동산을 매입해야 할 경우 일반적으로 중국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SPC의 주식을 취득하는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는게 현지 공장을 설립했던 관계자의 얘기다.
그는 "중국 법규 상 외국인의 부동산 취득이 워낙 까다로워 매입에 따른 규제를 피하고 매입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조세피난처에 있는 SPC를 인수할 수밖에 없다"며 "중국 부동산 소유자들도 이러한 이유때문에 해외에 SPC를 설립해 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 분위기 휩쓸려 기업활동 위축시키지 말아야
전경련의 홍성일 조세금융팀장은 "기관투자자들이 국내 투자신탁을 이용해 해외에 투자하는 경우나 연기금, 한국투자공사 등 기관들이 해외에 투자할 때도 룩셈부르크 등에 SPC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다"며 "미국, 영국 등 일부 국가의 경우 외국인이 자국 부동산을 매입하면 자국에 사업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세금을 징수하고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SPC를 설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정승영 박사는 "일부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외국인에게 까다로운 규제를 적용하는 경우 이를 피하기 위해 조세피난처를 활용하는게 국제 관례화 돼 있다"며 "우리 기업들만 조세피난처를 활용하지 못할 경우 경쟁력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최근 조세피난처에 있는 법인을 무조건 탈세의 온상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기업들의 정상적인 사업활동이 지장받는 것은 아닐까 기업들이 걱정이 많다"며 보다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세청 관계자도 "정상적으로 해외투자신고를 한 현지법인이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는 경우는 조사대상이 아니다"라며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설립했어도 기업 경쟁력 제고나 국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를 면밀히 구분해 과세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과세방향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