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총리 파머스턴 경(헨리 존 템플)은 "국가 간에 영원한 친구나 동맹은 없다. 영원한 이해관계(국익)만 있을 뿐이다"고 갈파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적성국과 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감청 및 정보 수집을 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맹국들과 도청파문을 둘러싼 외교 갈등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전화를 10여 년간 도청했다는 의혹에다,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도 수천만 건의 전화를 감청했다는 폭로가 꼬리를 물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정부는 미국에 엄중 항의했고,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 국빈방문도 취소했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도청우려 때문에 휴대폰이나 개인이메일 사용을 일체 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다.
주요 국가 정상 35명에 대한 통화 도청 의혹에다, NSA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국 및 일부 동맹국 대사관을 활용해 도청 등 광범위한 정보수집 활동을 해왔다는 내용의 내부 문건이 추가로 공개되면서 도청 파문은 아시아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NSA는 한동안 'No Such Agency:그런 기관도 있나?'란 조크가 나돌 정도로 존재감이 미약했다. 하지만 디지털정보화의 기술혁신과 911테러를 겪으면서 통제 불능의 '정보괴물'로 거듭 태어났다. '음지'(陰地)에서 쉬쉬하는 정보기관의 공작활동내용이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확인됐다는 것 또한 너무도 충격적이다.
전직 중앙정보국(CIA)요원이자 NSA 외주업체 부즈앨런해밀턴에서 일하다 지난 6월 초 미국과 영국의 전화인터넷 감청망을 첫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41개 분량의 기밀파일을 유출시켰다. 그 중 4개만이 현재까지 공개됐을 뿐이다. 향후 공개될 문서의 파괴력여하 따라 미국과 동맹국간 갈등은 깊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동맹국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미국이 자신과 첩보협약을 맺지 않은 독일과 일본 등 모든 동맹국들을 첩보활동의 대상으로 삼아왔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다섯 눈'(Five Eyes)으로 불리는 배타적 첩보클럽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5개국은 첩보활동에서 상호공조 및 정보를 공유하면서 서로를 상대로 첩보활동은 하지 않는다는 협약을 맺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일본군의 암호를 풀려고 협업한 데서 비롯됐지만 미국주도 세계정보질서 구축과 유지를 위한 영미권 그들만의 '협력 틀'로 기능해 왔다.
미국 NSA의 무차별적 첩보활동에는 영국의 정보통신본부(GCHQ) 등 이들 영어권 국가들의 정보기관들이 협업하고 있고, 미국 국내법에 저촉되는 정보활동은 영국이 대리인으로 나서주고 있다. 2009년 런던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참가국 관리들을 대상으로 영국 정보기관이 무차별적인 해킹과 도청을 벌였다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폭로가 이를 뒷받침 한다. 이 클럽에 끼지 못한 동맹우방국들은 정보공유에서 소외될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를 더 받는 황당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독일총리 휴대폰에 대한 미국의 도청은 미국과 독일 간 국익충돌의 산물로 전해진다.
독일이 미국의 주요맹방의 일원인 것은 틀림없지만 러시아에 대해 유화적이고, 이란과의 유대, 그리고 중국과의 긴밀한 경제관계 등으로 미국의 불신을 많이 사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런 독일만이 아니고, 유럽연합(EU)과 유럽위원회,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그리고 한국과 일본 등 다른 동맹국들 또한 무차별적 정보수집 대상이 되고, 이들의 감시에 '다섯 눈'의 정보인프라가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맹'이란 이름이 무색하다.
첩보를 수집하는 도구도 가공할 정도로 첨단화체계화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7년 부시 정부 때 개발돼 6년간 천문학적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진 NSA의 '프리즘(PRISM)'은 구글, 페이스북 야후 등 글로벌 IT기업들의 서버(대형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사용자 정보를 수집 분석해온 곳으로 밝혀졌다.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와 은행, 인터넷 보안업체, 위성통신업체 등 많은 미국 정보산업 거인들이 정부 프로그램에 참여해 첩보수집에 동참해왔고 상대국 컴퓨터에 침투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기업들은 민감 정보를 주는 대신 정보 접근을 비롯한 각종 혜택을 받고 있다고 들린다.
영국 정보통신본부(GHCQ)는 북미-유럽을 잇는 통신 광케이블을 가로채 전화인터넷 자료를 도감청하고, 이를 미국 NSA와 공유하며 합동 분석해 왔음이 드러났다. 작전명 '템포라'('시간'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이름 붙여진 도감청 작전은 광케이블로 연결된 모든 형태의 정보를 빨아들여 세계 인터넷 사용자 20억 명의 일상을 감시해 와 스노든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민간인 감시망"이라고 폭로했다.
미국정부는 이 모두가 "테러 방지를 위한 정보수집의 일환이었고, 통신감청 프로그램 덕분에 테러 수십 건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맹 및 우방국 정상 전화도청과 마구잡이 인터넷 민간인 감시망은 테러방지활동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국제사회는 지금 국적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가 앙겔라 메르켈이다"는 피해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무차별적 첩보활동은 외교전선과 글로벌 인터넷산업에 거센 역풍을 몰아오기 시작했다. '빅 브라더'와 '그림자제국' 미국에 대한 동맹 및 우방국들의 불신 및 견제가 몰고 오는 당장의 외교적 찬바람도 문제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역풍은 '디지털 국경(國境)'의 부활이다. 세계 인터텟 산업을 주도해온 미국 IT산업분야에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된다.
브라질 정부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아웃룩 등 연방 공무원들이 사용하는 기존 이메일을 자체 개발한 새로운 시스템으로 대체를 서두르고 있다. 또 구글과 페이스북, 트위터 등 미국 IT 기업들이 브라질 내에서 얻은 정보를 외국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데이터 센터를 브라질 안에 구축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장기 국익의 관점에서 첩보활동으로 미국이 잃는 것이 더 많다. 궁지에 몰려있는 오바마 대통령이 이번 기회에 정보수집관행을 개혁해 동맹국과의 관계개선과 국내적 신뢰구축에 나선다면 스노든의 폭로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무한경쟁시대에 정보는 국력이다. 동맹국이라고 안심은 금물이다. 정보를 빼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 무엇으로 보안을 하느냐는 질문에 손으로 돌리는 구식 전화박스를 가리켰다고 한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타자기와 서류 캐비넷 시절로 복귀한다는 풍문도 나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지금껏 무풍지대다. 우리 청와대에서도 대통령이 필담으로 회의를 하거나 암호를 사용해야 할 날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국가정보원의 댓글소동으로 국력과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