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강도 높은 '규제개혁' 카드를 꺼내들었다. 기업들과 국민들의 역량이 뛰어나도 '암덩어리' 같은 규제들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면 경제 활성화는 머나먼 얘기라는 것이 핵심요지다.
사실 세법은 규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사전적 범주일 뿐이며 현실에서의 세법은 국민과 기업 등에 '규제'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잘못된 세법은 국민의 개개인의 생활, 개별기업의 경영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내국세와 관세 등 세법 속 개혁해야 할 규제들을 선별해 개선을 촉구하는 [캠페인]세법 속 '규제', 이것만은 고치자 시리즈를 연중기획으로 보도한다. -편집자주-
무엇이든 빠르게 변하고 있는 21세기, 최신식 스마트폰마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구형 취급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빨리 빨리'는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시대 분위기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사람들의 가치관도 생각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이것'만큼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땅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통관이 보류되는 성인용품 중 하나인 '자위기구'이다.
관세청은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법원의 통관허용 판결을 받지 않은 성인용품에 대해선 무조건 통관보류를 하고 있으며 통관을 원하는 수입업자는 직접 사법부의 통관허용 판결을 받아오라고 요구하고 있다.
과거 수입통관됐던 자위기구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자위기구라면 무조건 통관을 보류시키는 관세청 때문에 수입업자들은 새로운 물건을 수입할 때마다 불필요한 비용(소송 비용 등)을 지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 '무조건 막는' 관세청 vs '답답한' 수입업자 = 미풍양속을 지켜야한다는 관세청과 개인의 성적기본권과 자기결정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수입업자들의 전쟁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가장 최근인 지난달 21일 결정된 조세심판원의 심판례(조심2014관0090)를 보더라도 자위기구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고 선량한 성적도의 관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통관을 보류한 관세청에게 재조사하라는 경정처분을 내렸다.
심판원은 자위기구 자체가 비정상적인 성행위라고 보기 어렵고 풍속을 해치는 물품이라 해서 수입통관을 보류하는 것은 국민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고 지적했다. 단, 자위기구가 선량한 사회 풍기를 해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관세청은 해당 물품에 대해 재조사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심판원은 선량한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자위기구의 통관을 보류한 관세청이 지나치다고 결정을 내린 셈이다. 문제는 이런 심판원의 결정이 여러 건의 심판청구 중 한 두건에 머무르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자위기구 통관보류로 심판을 청구해 결정이 난 사건만 43건이며 모두 관세청의 통관보류 처분이 지나치며 재조사를 통해 통관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경정처분이 내려졌다.
□ 법원도 '불법' 아니라는데… = 무조건적인 자위기구 통관보류 처분이 지나치다는 조세심판원과 마찬가지로 법원도 자위기구에 대한 시각을 달리 가져가고 있다.
10여년 전인 지난 2003년 대법원에서는 여성의 성기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남성용 자위기구를 '불법'으로 판시했다. 사회통념상 자위기구 자체만으로 성욕을 자극하거나 일반인의 성적 수치심을 야기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5년 뒤인 2008년에는 여성용 자위기구에 대해 남성 성기를 개괄적으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고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불법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지난달 16일 청주지법은 자신의 성인용품점에 여성 성기 모양의 남성용 자위기구를 진열한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여성 성기를 재현했다는 것만으로 음란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성적 자기결정권 또는 행복추구권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죄 선고의 논거였다.
법원의 판결은 자위기구에 대한 인식이 개방적으로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세청은 여전히 한 번 통관됐던 물품이 아니거나 통관됐더라도 해외공급자가 다르면 무조건 통관을 보류시키고 있다.
결국 수입업자들은 불법이 아니라는 법원의 판례가 있음에도 추가적인 비용을 들여 조세심판원에 심판청구를 하거나 법에 호소하는 등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관세청의 자의적인 잣대가 아닌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통관을 해야 한다는 성인용품 수입업자들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 관세청 통관보류 관행, 바뀔까? = 이런 분위기에 관세청도 무조건 통관을 보류시켰던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 성인용품 통관제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그동안 수입업자에게 법원이나 조세심판원의 통관허용 판결을 받아오라고 했던 것을 관세청 본부세관 통관심사위원회에서 통관허용 여부를 심사하는 것으로 관련 제도를 개선할 것으로 알려졌다.
단,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성인용품 통관을 위해 모든 본부세관이 아니라 주요 공항만 세관으로 통관지를 제한한다는 계획이다. 인천공항세관과 평택직할세관, 인천세관, 부산세관 정도가 통관지로 지정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관세청은 오는 6월까지 성인용품 통관처리 지침을 개정하기 위해 통관심사위원회의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관세청 관계자는 "현재 통관심사위원회의 심의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협의 중에 있다"며 "의견을 수렴해 통관심사위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