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들어 부쩍 가까워진 한국과 중국이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에서 '미래의 동반자관계'를 향한 새로운 장정(長征)을 시작했다.
지난해 6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베이징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의 확대정상회담 환영사에서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의 한시 '범해(泛海)'를 인용해 눈길을 끌었다.
시 주석은 "당나라 시대 최치원 선생님은 중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괘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이라는 시를 쓰셨다"고 했다. 한국과 중국 사이는 역사가 유구하다며 한중관계가 과거부터 가까웠음을 강조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중국 초청방문을 '심신지려'(心信之旅 마음과 믿음을 쌓아가는 여정)라고 화답했고, 시 주석은 1년 만에 국빈자격으로 한국을 답방하면서 이례적으로 한국 주요 언론사들에게 '순풍에 돛을 달자'는 제목의 글을 띄웠다.
"꽃 한 송이가 피었다고 봄이 온 게 아니라 온갖 꽃이 만발해야 비로소 봄이 왔다고 말할 수 있다"며 양국 간 협력의 전면적 확대를 주문한 것이다. 시 주석은 중국의 꿈과 한국의 꿈은 서로 다르지 않다며 중국의 '2개의 100년' 목표와 한국의 '제2 한강의 기적'을 함께 이뤄가자고 제의했다.
시주석이 말하는 '두 개의 100년'(兩個一百年)은 '중국의 꿈'을 실현시키는 두 개의 목표시점이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2021년까지 물질적 어려움이 없는 '샤오강(小康)사회'를 건설하고, 신중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중화민족부흥을 현대적 선진국가로 완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박 대통령이 주창한 한국의 꿈은 '희망의 새 시대' '국민행복시대'다. 중국의 강과 한국의 강이 서해바다로 흘러 하나가 되듯 중국의 꿈과 한국의 꿈이 만나 동북아의 꿈으로 더 크게됐으면 한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박대통령은 화답했다.
시 주석의 한국 1박 2일 일정은 국빈방문치고는 매우 짧았다. 이는 거꾸로 한‧중 관계가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도 된다. 한‧중은 서로가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라도 갈 수 있는, 지리적‧심리적으로 가까운 사이다. '친척집을 다녀갔다'는 중국 측 너스레가 생뚱맞지는 않다.
한‧중 수교 22년 사이 무역과 수출 수입 해외투자 인적왕래 유학생 등 6개 분야에서 양국관계는 다른 나라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자본·재화·사람이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관계발전의 여지도 크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체결과 위안화 직거래시장 개설, 인적교류 1천만 명 등을 통한 양국 간 경제융합은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바뀌어가는 중국에서 한국기업의 기회를 확대해,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중국의 꿈과 한국의 꿈을 함께 실현시켜 나갈 수 있는 평화적인 외부환경이다. 시 주석은 한국 언론 기고문에서 지난해 박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천리 멀리까지 보기위해서 다시 누각을 한 층 더 오르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라는 중국 서예작품을 선물했었다며 이는 양국관계 미래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담은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한․중 정상이 동맹관계나 패권경쟁구도를 넘어 더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누각 한 층을 더 올라서기에는 누각 안팎의 바람은 너무도 거세다. 한․중관계의 새로운 지평은 아직 도 안개 속이다.
미‧중, 중‧일의 힘겨루기가 심화되고 중‧러, 북‧일, 북‧러 관계가 덩달아 복합적으로 변모하는 지극히 민감한 시점에서 시 주석이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찾았다. 미국은 '한미동맹 흔들기'로 받아들였고, 일본 역시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주시하면서 한‧일, 중‧일, 북‧일 관계 좌표 조정에 부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상 한국이 요구해온 '북한 비핵화'에 대해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만 재확인했다. 박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북한 비핵화"와 시 주석이 말한 "한반도 비핵화"에는 현격한 차이가 감지됐다.
중국은 미국과 동맹인 한국에 언제든지 미국의 핵이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을 경계한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에는 북한의 체제 유지를 원하는 중국의 속내도 담겨 있다. 중국은 북한이 핵문제로 골치 아픈 일을 만들더라도 북한이 붕괴해 자국의 문턱인 한반도가 미국의 세력 범위로 변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 개념으로 해석되는 박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에 중국이 명시적 지지를 주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이 한반도 대원칙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와 안정,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거듭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 주석이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했다 해서 중국의 근본적인 대북정책이 바뀐 것으로 속단함은 오산이다. 미우나 고우나 중국은 북한체제의 존속을 원한다. 한국에 대한 배려, 북한에 대한 압박, 미‧일을 향한 메시지 등 전략적 고려가 숨어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미국과 일본 등이 중국을 옥죄고 있는 현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친구라고 할 만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경제적 유대와 과거사 고리를 붙잡아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중국은 안간힘이다. 시 주석이 방한선물로 판다를 임대해주고 서울대 강연에다 부인을 대동하는 것도 대외적으로 한․중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한국이 미‧일 편향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으려는 일종의 '매력 공세'다.
시 주석이 미‧일과 대립각을 세우는 아시아안보기구 및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설에 한국이 동참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일관계 악화를 이용해 중국이 한미일 동맹의 틈새를 벌이려하고, 일본이 북한에 손을 내밀어 한중사이를 벌이려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패권다툼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동북아지역에서 미‧중 간 경쟁구도가 노골화하면서 한국은 미‧중간 구조적 대립의 한가운데 놓여있다.
중국의 꿈과 한국의 꿈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니고, 더 큰 동북아의 꿈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은 한 둘이 아니다. 한미동맹과 한중 동반자관계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취하며 한국이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한국외교의 당면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이 필수적이고, 여와 야를 떠나 국가적 지혜를 모아야한다.
외교는 내치의 연장이다. 세월호 참사에다 잇따른 인사 참사로 국정운영이 동력을 잃고 대통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외교마저 갈피를 잡지 못한다면 '한국의 꿈'은커녕 이런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어디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