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 황제 유비는 관우와 장비가 죽자 제갈공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우들의 복수를 위해 출정한다. 그러나 이릉전투에서 오나라 대도독 육손의 화공에 속절없이 당해 대패하고 만다.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유비는 공명을 불러 어린 아들 유선을 탁고(託孤)한다. 장차 고아가 될 자식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것. 위‧오‧촉 중 위를 정통으로 본 진수조차도 그의 저서 삼국지에서 이렇게 평했다. “나라와 어린 아들을 공명에게 맡기면서 한 점의 의심도 없었으니 참으로 군신간의 지극한 공덕이고 고금의 모범이로다.”
탁고를 받은 공명은 유선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한다. 딴 마음을 먹었다면 모자라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유선을 제치고 제위에 오를 수도 있었던 공명. 그러나 그는 오장원에서 위나라 사마의와 대치 중에 숨을 거둘 때까지 단 한번도 한눈팔지 않고 유비의 탁고를 신실하게 받들었다. 만고의 귀감이 되는 후견인이 아닐 수 없다. 사후 근 2천년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공명이 추앙되는 것의 이유다.
한정치산제 폐지 성년후견제 도입
의사능력은 자기 행위의 의미나 결과를 정상 수준의 인지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신능력이나 지능을 뜻한다. 의사능력 없는 자의 행위는 무효이다. 그러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법률행위 당시 의사능력이 없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 만큼 의사무능력자는 입증책임의 측면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상대방 또한 예측하지 못한 변수 때문에 자칫 거래가 무효로 될 수 있어 거래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 양면을 감안, 구 민법은 한정치산‧금치산제도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정치산자와 금치산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을 터. 마치 죄인 다루듯 했다. 이들의 가족들이 여러 모로 정신적 피해를 입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정치산‧금치산제도가 일률적으로 당사자의 행위능력을 제한한다는 문제 제기 또한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13년 7월 1일 이후 시행된 개정 민법은 한정치산‧금치산제도를 폐지하고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임의후견 등 새로운 유형의 보호제도를 도입했다.
광의의 성년후견은 이 4유형의 후견제도 모두를 포섭한다. 거기에는 협의의 ‘성년후견’도 포함되어 있다. 아래에서는 협의의 성년후견에 포커스를 맞추어 살펴보도록 한다.
본인 배우자 등이 청구해야
성년후견인이 법정대리권을 행사할 수 있는 피성년후견인은 질병, 장애, 기타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 때문에 사무처리 능력이 결여된 상태가 지속되는 사람으로서 가정법원이 성년후견의 개시를 명한 사람을 말한다.
성년후견개시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는 본인, 배우자, 4촌 이내 친족, 검사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 등이 이를 청구해야 한다. 법원이 피성년후견인으로 심판한 자는 원칙적으로 행위능력을 상실한다. 그가 한 법률행위를 그 스스로 또는 성년후견인이 취소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법원은 피성년후견인에게 남아 있을 능력을 고려하여 일정액 이하의 법률행위의 취소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 취소할 수 없는 피성년후견인의 법률행위 범위를 법원이 정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이 따로 정하지 않더라도 일용품 구입 등 일상생활에 필요하고 그 대가가 과도하지 않는 피성년후견인의 법률행위는 성년후견인이 취소할 수 없다.
건강 생활관계 직업 경험 고려해야
구 민법은 후견인의 순위를 일률적으로 법으로 정했다. 그러나 개정민법은 이해가 대립될 수 있는 배우자, 직계혈족 등이 자동적으로 후견인이 되는 것을 막았다. 법원이 후견인으로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선임할 수 있도록 법정순위를 폐지했다.
개정민법에 따라 법원은 피후견인의 의사와 심신상태, 생활과 재산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성년후견인을 선임할 수 있게 되었다. 개정민법은 성년후견인 선임 시 피성년후견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며, 그의 건강 생활관계 재산상황 성년후견인이 될 사람의 직업과 경험, 피성년후견인과의 이해관계 유무 등 사정도 고려할 것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법인도 사업 종류와 내용, 법인이나 그 대표자와 피성년후견인 간의 이해관계 유무를 고려하여 성년후견인으로 선임될 수 있다.
피성년후견인의 신상과 재산사정을 감안하여 다수의 성년후견인을 선임할 수도 있다. 성년후견인이 여러 명인 경우 법원은 이들이 공동으로 또는 사무를 분장하여 권한을 행사하도록 정할 수 있다. 법원이 수인의 성년후견인들의 권한에 관하여 정하지 않은 경우 민법의 ‘각자대리원칙’에 따라 성년후견인들이 각자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재산에 관한 법률행위 포괄적 대리
성년후견인은 피성년후견인의 법정대리인으로서 피성년후견인의 재산에 관한 법률행위에 관하여 그를 포괄적으로 대리한다. 다만, 이 법정대리권의 행사에도 한계는 있다. ① 피성년후견인의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채무의 부담 ② 피성년후견인에 대한 이해상반행위를 하는 경우 또는 ③ 기타 법률이 후견감독인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한 중요행위에 관하여는 제한이 가해진다는 얘기다.
특히 성년후견인이 피성년후견인과 이해가 상반되는 행위를 하는 경우 후견감독인이 피성년후견인을 대리하게 된다. 후견감독인이 없는 경우에는 성년후견인은 피성년후견인을 위한 특별대리인의 선임을 법원에 청구해야 한다. 이해상반행위는 행위의 객관적 성질상 후견인과 피후견인 사이에 이해가 대립될 우려가 있는 행위를 말한다. 행위 자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판단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후견인의 의도나 그 행위의 결과 실제로 이해대립이 생겼는가는 묻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성년후견인이 돈을 빌리면서 피성년후견인을 연대채무자로 하여 피성년후견인 소유의 부동산에 저당권을 설정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이해대립이 생기게 된다. 또는 성년후견인이 제3자에 대한 채무에 관하여 성년후견인과 피성년후견인의 공유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경우도 이러한 사례에 포함된다.
법원은 이해상반행위를 특별대리인에 의해 행하지 않은 경우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이를 무효로 본다. 후견감독인이 피성년후견인을 대리하지 않은 채 성년후견인이 이해가 상반되는 행위를 한 경우에도 무효로 판단될 가능성이 높다.
성년후견인의 대리권 행사 외 후견감독인의 동의가 필요한 행위로는 영업 또는 재산상 중요한 행위를 들 수 있다. 영업에 관한 행위, 금전차입, 의무만을 부담하는 행위, 부동산 또는 중요재산에 관한 권리의 득실변경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 소송, 상속의 승인, 한정승인 또는 포기 및 상속재산의 분할에 관한 협의가 그 것이다. 동의 없는 성년후견인의 이런 행위는 피성년후견인이나 후견감독인이 이를 취소할 수 있다.
신분행위는 본인 의사 반드시 존중
피성년후견인도 혼인‧입양 등 신분행위는 부모나 성년후견인의 동의 하에 이를 행할 수 있다. 신분행위는 당사자의 인격과 직접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본인의 의사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성년후견인의 동의 하에 피성년후견인이 입양과 파양 등 신분행위를 하더라도, 성년후견인과의 재산상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면, 이해상반행위로 판단될 여지가 없지 않다. 신분행위에 있어서는 당사자인 피성년후견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의사무능력자인 피성년후견인의 의사를 입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제갈공명은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유선에게 (후)출사표를 올린다. 거기에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고 죽은 후에야 이를 그치겠습니다”라고 썼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다. 후견(後見)을 글자 그대로 새기면 “뒤에서 본다”이다. 뒤에서 돌보아 준다는 뜻이다. 공명의 이 말은 남을 뒤에서 돌보아 주는 후견인들이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공동집필 김용상‧정인아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