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정장을 차려입고 대문을 나서는 나를 어머니가 불러 세웠다.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만으로 20세가 되어가는 1966년 6월 20일, 대구서부세무서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용근아! 이 애미는 네가 한없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미안하구나.
어엿한 직장인, 그것도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이 되어 첫 출근을 하는 네가 대견하면서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미안하구나.”
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이소, 나 잘할끼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잘 보살펴 주실 끼다. 이제 첫 출발이니 엄마는 뒤에서 열심히 기도해 주이소.”
어머니는 그런 나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한동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지금 아들 용근이가 사회 첫발을 내디딥니더. 얘가 가는 길에 주님께서 항상 같이 해 주이소, 아멘.”
대문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나의 첫 직장인 대구서부세무서를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집에서 세무서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였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연일 쏟아지는 어려운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정말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베개에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교복에 대학교 배지를 단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고된 업무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삼삼오오 어울리는 대학생 친구들을 볼 때마다 커다란 상실감이 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특히, 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을 보면 그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괜히 주눅이 들어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을 일부러 피해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건데.’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나의 몸을 더욱 고단하게 했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업무와 직장 선배님들의 강압적인 태도도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내 처지를 비관하며 후회하는 마음으로 살 것인가. 더 이상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하지만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안기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어렵게 합격한 공무원 자리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정한 게 야간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청구대학(現, 영남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넣었다. 같은 대구시내라서 퇴근 후 강의를 들으러 가는 데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당시 청구대학 야간학부는 인근 지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과 직장인들이 대거 몰려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제법 높은 순위권에 있었던 나였지만, 책을 놓은 지 1년이 지났다. 마음속에 점점 불안감이 커져갔다.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틈틈이 입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늘 좋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학비가 없을 때 학비를 주셨고, 직장이 필요할 때 직장을 주셨습니다. 저는 늘 당신을 믿고, 당신께서 열어주신 길을 걸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당신께서 예비하신 그 길을 걷겠습니다. 당신께 온전히 쓰임 받는 그날까지, 진정한 믿음의 일꾼이 되는 그날까지 제가 걷는 그 길을 멈추지 않게 해주소서.”
시험 당일, 벌써 승리를 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그렇게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공부와 기도가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확신과 믿음이 점점 굳건해졌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사히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까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 당일, 대학교 게시판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평범한 길을 허락하지 않으신 게 분명했다.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올라 있는 내 이름 위에 ‘수석’이라는 타이틀과 4년간 전면 장학생이라는 보너스를 기어이 붙여주시고야 만 것이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내 해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떠올랐다. 이미 나는 직장생활을 통해 받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등록금을 해결해 놓은 상태였다. 더 이상의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모든 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다. 이미 등록금으로 준비해 놓은 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한다.’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주일날 등록금 전액을 가지고 교회로 가는 발걸음이 제법 무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새 나는 교회 앞에 서 있었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힘차게 교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등록금 전액을 감사헌금으로 드렸다. 그때 헌금 봉투에 사연을 간단히 적었는데, 그걸 확인한 목사님께서 적잖은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다. 목사님은 설교 말씀을 전하시다가 갑자기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성도님들, 저기 자리에서 일어난 저 청년이 이번에 청구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한 조용근이라는 학생입니다.
조용근 학생은 강성이 집사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늘 기도로 준비하여 국세청공무원을 비롯해, 대학교 수석합격의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그런데 그간 월급에서 모아 놓은 등록금 전액을 이렇게 감사헌금으로 올렸습니다. 그동안 강성이 집사님이 그렇게 열심히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저 아들에게 복을 주신 것 같습니다.”
민망할 정도로 크게 내 행동을 칭찬해 주시는 목사님의 말씀에 얼굴이 붉어져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내 쪽을 보시고는 환하게 웃고 계셨다. 눈물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그때도 눈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눈물보다 환한 웃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늘 조용히 교회 한구석에서 눈물로 기도하던 어머니는 수많은 성도들의 축하를 받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효도라는 것을 한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어머니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스스로 재능이 넘쳐 모든 일이 잘 풀린 것이라고 여기며 우쭐거린 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권위적인 아버지의 폭력과 무시에도 굴하지 않고 늘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신 어머니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