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리샴의 소설 ‘유언장’. 기업가 트로이 필런이 투신자살하면서 유언장을 남긴다. 전재산 110억 달러를 사생아 레이첼에게 물려준다고. 레이첼 외 여섯 자식들이 유언을 무효화하려고 소송을 벌인다. 문제는 레이첼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필런의 유지(遺志)를 지키려는 변호사 네이트가 천신만고 끝에 브라질 밀림 속의 인디언부족에서 선교하고 있는 그녀를 찾아냈으나 그녀는 끝내 유언장 내용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서 선교하면서 평생을 살기로 한 그녀에게 돈은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 소송에서 이긴 네이트가 의기양양하게 그녀에게 다시 찾아갔으나 그녀는 말라리아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상속될 재산 전부를 신탁하니 신탁수익을 선교와 자선에 쓰라는 유언장만 남긴 채.
소설은 거액의 재산을 부각시켰다. 그래야만 스토리가 되기 때문이리라. 재벌가 상속을 둘러싼 드라마도 그렇다. 동화 속 그림 같은 저택에서 미모의 젊은 상속녀를 그려낸다. 상속이 모든 이의 로망이 될 수 밖에 없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속에도 어두운 구석이 있다. 상속이 개시되면 재산뿐만 아니라 빚도 상속되기 때문이다.
상속포기와 한정승인 증가 추세
서울가정법원 발표에 따르면 2009년 각 2673건과 5342건이었던 상속포기와 한정승인 건수가 지난해 3213건과 6851건으로 늘어났다. 피상속인의 채무 등 불리한 재산적 법률관계를 승계하지 않기 위해 상속을 포기하거나 한정승인하는 현상이 늘고 있는 것이다.
상속인의 선택지는 셋. 단순승인, 한정승인과 상속포기가 그것이다. 단순승인을 하면 피상속인의 재산법상 권리관계가 포괄 승계된다. 채무도 승계된다. 반면 상속을 포기하면 재산법적 권리의무관계는 전혀 승계되지 않는다. 한정승인은 상속으로 취득할 재산의 한도 내에서 피상속인의 채무와 유증을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속을 승인하는 것이다.
예컨대 피상속인에게 부동산 4억원과 채무 7억원이 있다면 한정승인을 한 단독상속인은 부동산과 채무를 모두 승계하나, 4억원의 적극재산의 범위 안에서만 채무를 변제하면 된다. 채권자가 3억원을 못 받더라도 상속인의 고유재산에 강제집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속의 승인과 포기는 상속재산 전부에 관해 포괄적으로 행해야 한다. 일부에 관하여만 상속을 승인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적극재산만을 상속하고 소극재산(채무)은 상속하지 않는 것은 불허된다. 적극재산 범위 안에서 소극재산을 상속하는 한정승인만이 허용될 따름이다.
상속을 거부할 자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상속인들에 대한 경제적 연좌제를 배척하겠다는 것이 한정승인과 상속포기의 입법취지다. 그러나 상속인에게 선택권을 준 결과 상속재산의 권리·의무관계가 불안해 질 수 있음을 감안, 민법은 상속개시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 내에서만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기간 내 행하지 않으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본다.
피상속인 재산과 부채의 조회
상속인이 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할 때의 문제는 피상속인의 모든 채무를 변제하고도 남는 재산이 있는가의 여부일 터. 단순승인을 선택했는데 당시에는 몰랐던 거액의 채무가 불거지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다만 상속인이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3개월 내 알지 못하고 단순승인했다면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 한정승인할 수 있다.
상속인이 세 선택지 중 어느 것을 잡는가는 피상속인의 재산상황에 달려 있다. 그러나 피상속인이 사망한 상황에서 그의 재산상황을 파악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금융거래내역은 금융감독원과 각 금융협회 홈페이지를 통해 조회할 수 있다. 최근 세금·과태료 등 체납정보도 조회대상에 포함됐고 구청이나 동주민센터 일부도 조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조상땅찾기 민원서비스를 이용하면 공부(公簿)상 피상속인이 최후소유자로 등재된 토지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상속개시일로부터 3개월 내 피상속인의 재산상황을 조회함이 바람직하다.
다만 피상속인이 제도금융권 외의 채무를 지고 있다면 알기 어렵다. 토지 아닌 재산의 경우도 일괄조회가 쉽지 않다. 불안하다면 한정승인 신고를 하여 불안한 지위를 해소함이 좋다. 한정승인 신고를 하면 채권자공고와 최고를 거쳐 채권자들에게 상속재산 범위 내에서 배당변제를 받을 기회를 준다.
상속재산 먼저 팔면 낭패 볼 수도
민법은 상속인이 상속재산에 대한 처분행위를 한 경우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法定단순승인). 이때는 채무도 포괄 승계된다.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채무초과 상태임을 중대한 과실로 몰랐거나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위한 숙고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법정단순승인사유에 해당되는 행위를 하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상속개시 이후의 상속재산의 관리나 처분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민법은 상속인이 자기 고유재산에 기울이는 것과 같은 주의로 상속재산을 관리토록 한다. 그러나 단순승인 또는 상속을 포기한 때에는 그렇지 않다.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한 후에도 상속인이 상속재산을 은닉하거나 부정소비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법정단순승인 사유다. 무엇이 은닉과 부정소비인가는 사안마다 다툼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상속인의 채권자가 상속인이 한정승인 또는 상속포기를 한 이후에 그런 행위를 했음을 이유로 법정단순승인 사유가 생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 만큼 한정승인 또는 상속포기 이후의 상속재산처분에 대하여는 법률전문가의 조언을 받는 것이 좋다.
상속포기·한정승인시 차순위상속인 고려해야
상속포기를 할 때는 차순위상속인이 채무초과상태로 상속받게 될 가능성도 간과해선 안된다.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면 차순위 상속인인 손자녀나 직계존속, 형제자매, 사촌 이내 방계혈족에게 채무가 승계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차순위상속인들도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해야만 당초 원했던 법률효과를 누릴 수 있다. 차순위상속인은 선순위상속인 전원이 상속을 포기한 결과 자신이 상속인이 됐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 상속을 포기하면 된다.
피상속인의 사망으로 슬픔에 잠긴 상속인들이 상속문제를 이성적으로 처리하기는 어려울 터. 거기에 빚까지 떠안으라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그럴수록 마음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재산법률관계를 챙기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공동집필 최재혁·박민정 변호사
영어로 가족은 family다. family는 라틴어 familia에서 유래됐고 파밀리아의 어원은 또 다른 라틴어 famulus이다. 놀랍게도 famulus는 노예나 하인을 뜻했다. 거기에서 가족과 하인을 포함한 공동체라는 뜻의 파밀리아가 파생됐다. 그것이 중세영어의 familie로 변형됐다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란 뜻의 family가 되었다. 주인과 하인의 차이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태어난 뒤에 만난 운명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본 로마문화의 포용력을 여기서도 보는 듯 하다.
지난 6개월 동안 13회에 걸쳐 유언·상속·이혼·입양과 파양 등 가족관계의 핵심 내용과 그에 따른 세금문제를 짚어봤다. 가족관계의 삼라만상을 다루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다만 상속과 가사문제에 있어 반드시 알아야 할 기초적 법률지식은 충분히 실었다고 자부한다. 나머지는 법률가들의 컨설팅에 맡긴다.
지난 3·40년간 가부장적인 가족관계는 무너지고 핵가족화가 무섭게 진행됐다. 거기에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심화되면서 대재산가가 속출했다. 인간관계보다는 물질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상속재산을 놓고 가족 간에 분쟁이 생겨 그 심판을 법원에 맡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법원에 가더라도 서로에 대한 비방과 원망으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여전히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하인까지도 파밀리아의 일원으로 보았다. 집필 과정에서 ‘효와 형제애를 기본으로 한 유교적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이라는 화두가 문득문득 고개를 들었다. 혹자는 말한다. Family가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여섯 단어 두음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가족관계의 기본이 사랑에 있음을 새삼 일깨워 준다. 시사하는 바 크다.
김앤장에 귀한 지면을 흔쾌히 허락해준 조세일보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특히 멋들어진 헤드라인을 뽑아 원고를 빛나게 해주신 편집진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