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한국 금융…신뢰는 행방불명(종합)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국 금융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는 비판이 계속됐다.

대한민국 최고 금융그룹으로 꼽히는 KB금융의 두 수장은 올 초 대량의 카드 정보 유출 사고에 이어 도쿄 지점 불법 대출, 주전산기 교체 문제로 인한 내분 사태에 대해 증언을 하기 위해 국감에 출석했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은 2012년 합병 이후 통합 문제로 잡음을 일으키며 전임 회장이 국감장에 불려나오는 사태를 겪었다.

금융협회의 도 넘는 방만 경영, 금융위원회 고위 관료의 낙하산 인사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날 국감장에서 한 금융위 고위 관료는 "증인들이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다. 징글징글한 KB"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건호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금융권을 가장 어지럽힌 KB 내분 사태가 국감장의 최대 이슈가 됐다.

임영록 전 KB금융그룹회장과 이건호 전 KB국민은행장은 증인으로 출석해 내분 사태에 대해 소명했다.

두 사람은 주전산기 교체 문제를 두고 부당한 인사 개입 등 갈등을 일으키며 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아 물러났다.

임영록 전 회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성의 시간을 갖겠다. 수장으로서 경영 혼란을 일으키고 정상화에 기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성이다"며 "귀가 안 들리고 눈도 멀어 다 내려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룹 수장으로서 물의를 일으킨 게 송구스럽고 모든 게 부덕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당 인사 개입의 의혹에 대해서는 "지주의 경영 관리 지침에 따라 사전 협의한 것이다. 이 행장이 강도를 세게 느낀 것이다"며 "주전산기 교체는 사실 경영전략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건호 전 행장은 "은행이란 기관은 사적인 기업이지만 공공 기능을 수행한다"며 "감독 당국에서 내가 거기 있는 게 마땅치 않다 판단했다면 존중하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또 "무엇을 달리할 수 있었을 지 여러 가지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다. 대단히 죄송하다"며 "결과가 왜 이렇게 됐는지를 떠나 은행장으로서 그 자리에 앉아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당국의 책임론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질타도 계속됐다.

김기식 의원은 "KB 사태의 본질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 권력 간 투쟁이다.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행장이 동반 퇴진했 듯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정찬우 부위원장, 최수현 금융감독원장과 최종구 수석부원장 모두 동반 퇴진해야 한다"며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임영록 회장은 고위 관료 출신의 소위 '모피아 라인'이다. 이건호 행장 역시 박근혜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경제 분야 실세 라인으로 꼽혔다.

김태환 새누리당 의원은 "금융계가 이렇게까지 엉망이 될 정도로 처리한 것에 대해 금융위원장도 큰 책임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금융 노사정 합의 위반, 야당 의원들 질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조기 통합을 둘러싼 노동조합과의 갈등이 국정감사장으로 번졌다.

야당 의원들과 증인으로 출석한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하나·외환 2.17 노사정 합의서'를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한명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외환은행의 5년 독립 경영을 보장해 주기로 한 합의서를 언급하며 "금융은 신용과 약속, 신뢰가 기본인데 과거 기자회견을 통해 전 국민에게 약속한 합의서, 즉 약속과 신뢰를 잘 지켰느냐"고 질의했다.

이어 "약속과 신뢰를 평생 지키며 살았다고 밝힌 한국 금융의 원로로서, 또 당시의 합의 주체로서 이 같은 독립 경영 보장은 지켜지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김 전 회장이 합의서 작성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카드는 가맹점 공동 이용, IT는 ATM 공동 운영에 합의한 것이라고 답해놓고 하나금융이 먼저 약속을 위반하고 카드 통합과 IT 통합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승유 전 회장은 "노조와 은행장도 같이 합의했고 합의서 전체 내용에 대해 신의성실의 원칙으로 지켜야 한다"며 외환은행 노조가 합의서를 먼저 위반했다"고 반박했다.  

이어 "ATM은 IT 통합을 하지 않아도 운영할 수 있지만 IT 통합은 다르다"며 "금융시장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선 방안에 합의했다"고 했다.

김 전 회장은 또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서명이 없는 합의서를 가져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합의서 원본에 금융위원장의 서명이 없다"며 "3자가 관여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김승유 전 회장의 증인 발언 직후 외환은행 노조는 반박 자료를 통해 "첨부된 합의서에는 IT 및 신용카드 부분 어디에도 통합이라는 단어가 없다"며 "시장 지배력 강화를 위한 개선 방안은 통합을 제외한 업무 제휴 및 협력 방안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금융협회 방만 경영 도마위…금융위 책임론 부각= 은행, 금융투자회사, 보험사 등 회원사 돈으로 운영되는 금융협회들이 방만한 경영을 계속해 논란이 일었다.

수천만원대 예술품을 구입해 사무실을 꾸미는가 하면 고위 관료가 퇴직 후 낙하산 인사를 이용해 자리를 꿰차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은 금융협회들이 전임 회장에게 과도한 전관예우를 하고 금융위원회 출신 고위 관료가 수차례 고위급 낙하산으로 내려간 점을 비판했다.

금융투자협회의 경우 황건호 전 회장을 1년 동안 고문으로 위촉해 월 500만원의 급여를 지급하고 최고급 승용차와 사무실, 비서를 지원했다. 금융투자협회 노동조합은 박종수 현 회장과 그의 부인이 동행해 미국과 프랑스로 호화 해외 출장을 간 점에 대해 논란을 제기한 바 있다.

전국은행연합회에서도 가족을 동반해 해외 출장을 가고 업무비를 과도하게 사용한 사실이 문제됐다.

쾌적한 사무실 환경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약 7519만원 상당의 예술품을 구입한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2012년 이후 예술품 구입 내역을 보면 2012년 1200만원, 2013년 4180만원, 2014년 4월 2139만원에 달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금융협회에 대해 포괄적인 감사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력 부족과 전문성 결여를 이유로 산하기관의 감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올해 7월까지 5년 동안 금융위원회는 이들 6개 금융협회에 대해 단 4번 감사했다. 같은 기간 금융감독원은 19번 검사를 수행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감사 인력이 부족해 협회에 대한 감사가 지연됐다"고 인정하며 "인력을 뽑을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 제도를 만들어 놓아야 이러한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협회를 직접 관여할 수 없다"며 "기본적으로 민간회사여서 곤란한 측면이 있고 제도적 방안을 검토하겠다. 국회와 상의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