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장기 저성장의 긴 터널로 향하고 있다. 기업도, 가계도 돈을 틀어 쥔 채 투자도 소비도 않고, 저투자·저성장·저물가·저금리 등 이른바 '신4저(新4低)' 현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내수는 여전히 부진하고, 중국 경제 둔화와 중국 기업들의 추격으로 수출제조업의 경쟁력에 적신호가 켜진 상황에서 미국의 양적완화 중단, 일본 엔저의 가속화 등 대외변수들로 인한 한국 경제 불확실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경제지표를 보면 한국경제는 일본형 장기불황까지는 뭣해도 장기 저성장의 불황터널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올해 3분기 성장률은 0.9%로 올 들어 분기별 성장률은 단 한 차례도 경기회복세의 기준점으로 여겨지는 1%를 넘지 못했고 소비자물가는 23개월째 2%를 밑돌고 있다.
'저성장-저물가'가 되면 가계와 기업은 소비와 투자를 미루고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는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빠져든다.
수출실적과 무역흑자는 사상 최대 규모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리지만 수출이 투자 및 소비로 연결되는 순환 고리가 오래전에 끊기면서 수출과 내수경기간의 괴리, 이른바 '경기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국내 기업의 현금보유는 459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34%에 이른다. 미국의 11% 대비 3배, 독일의 20%에 비해서는 1.7배 높은 수준이고, 기업들이 보유한 현금만 풀어도 GDP가 2% 늘어난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막대한 현금을 부둥켜안은 채 기업들은 '시계 제로' 상태에 빠졌다. 달러와 엔화 환율이 요동치면서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한 투자는 고사하고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마저 미적거리고 있다.
최경환부총리의 '초이노믹스'는 벌써부터 '약발이 다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대출규제 완화와 금리인하 등 돈을 풀어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시키려는 정책은 어차피 한계가 있다. 경제가 살아나려면 단기부양책과 함께 구조개혁을 통한 장기적 체질강화대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한 쪽 날개만으로 공중을 나를 수가 없다.
자산 가격이 오르면 소비욕구를 부추겨 투자도 늘어나고 고용과 생산도 늘어난다는 것은 해묵은 부양논리다. 경제 혁신을 통한 실물경제의 성장잠재력 확충이 없는 부동산과 증시 부양은 모래성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추가 인하 등을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일본의 돈풀기 정책 강화는 엔화 약세(엔저)를 가속화시켜 우리 수출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기준금리를 내리면 원화 가치가 떨어져 엔화 약세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은 그만큼 커진다.
문제는 미국의 통화정책과 엇박자가 난다는 점이다. 양적완화를 종료한 미국은 내년 중 금리 인상 시기를 엿보고 있어 우리 주식·채권시장에서 외국인 자금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이 추가 금리인하를 단행할 경우 자금유출 현상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저금리 심화에 따라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전셋값이 급등하는 부작용이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집을 사지 않고 빚을 갚거나 생계자금으로 쓰는 가계가 늘어나면서 가계대출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질(質)은 악화되고 있다.
박근혜대통령은 국회에서의 시정연설에서 우리 경제가 위기 속에서 도약하느냐, 정체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지금이 경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호소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대통령의 현실인식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총체적 위기극복을 위해 '고통분담을 통한 사회적 대타협 운동' 제의로 화답했다.
문희상 새정치연합 대표도 "경제가 급박하다는 인식에 완전히 공감하며, 그 해결에 전력투구하겠다는 각오와 의지에서 진정성을 느끼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그 해법이다.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세 가지 구조적 요인이 가장 벅차 난제다. 제조업의 공동화, 수출경쟁력 약화, 인구고령화 및 가계부채는 단순한 경기부양책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본질적인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
국내 제조업의 해외생산 비중은 2012년 일본(20.3%)과 비슷한 수준인 18%에 달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고 있다. 기업 경쟁력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국내 제조업 기반이 있어야 이와 연계해 기술력을 높여 생산성과 고용증대를 기약할 수 있다.
그나마 선전하던 수출제조업의 경쟁력 추락은 순환적 불황을 넘어 중국의 추적과 엔화 약세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중국은 막대한 자본과 내수를 기반으로 조선, 철강, 가전, 정유, 석유화학, 섬유 등에서 우리 턱밑까지 쫓아와 있다. 엔 약세는 중국 견제라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도 맞닿아 있어 쉽게 해소될 것 같지가 않다.
극심한 내수부진은 고령화에 대비해 소비를 뒤로 미루거나, 가계부채에 허덕여 소비를 줄이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계부채가 소비를 제약하는 임계수준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한은총재가 우려할 정도다. 저성장이 되면 소득이 줄 수밖에 없고, 저성장을 극복하려면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개혁이 필수적이다.
과감한 재정․통화정책으로 경기순환적인 단기과제에 대응하면서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거시경제의 틀을 다시 짤 필요가 있다. 현 난국은 GDP와 수출 등과 같은 거시지표를 관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중국 없이는 수출도 수입도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경제구조도 탈피해야한다. 저출산과 그에 따른 인구감소가 국가적 재앙이 되지 않도록 인구증가정책의 골든타임도 놓쳐서는 안 된다.
구조개혁에는 고통분담과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여당대표는 복지, 연금, 노사, 산업, 정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고통분담을 통한 사회적 대타협'을 제안했고, 야당대표 또한 복지재원 논의를 위한 '국민대타협위원회'를 제의했다.
문제는 실천이고, 이 실천을 위한 정치리더십이다. 우리사회의 갈등과 분쟁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발전의 기회와 에너지로 만들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새로운 그림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고통분담과 사회적 대타협으로 구조개혁과 체질을 개선해 경제주체들이 자신감을 갖고 역량을 발휘토록 대통령과 정치권이 앞장 서 이끌어야 한다.
일본의 장기불황이 '리더십불황'으로 불리듯 한국경제의 장기 저성장이 정치리더십 부재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리더십불황'이라는 오명(汚名)을 남겨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