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법 개정, 역사적 사건…지하경제 해결 과제"

1982년 5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영자·이철희 사건'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당시 수천억대에 달하는 어음 사기는 건국 이래 가장 큰 규모의 금융사고로 꼽히며 그 배경에는 '차명계좌'라는 불법 수단이 존재했다.

그 이후 차명계좌는 부도덕한 대기업과 정치인들의 불법적인 자금 통로로 자주 이용돼 왔다.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해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후에도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로 인해 차명계좌는 탈세와 자금 은닉의 주요 수단으로 악용됐다.

"차명거래를 금지했을 때 어마어마한 혼란이 생긴다는 게 그동안의 반대 논리였다.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차명계좌는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불법 차명은 적고 생활 관습에 의한 차명이 99%일 수 있어 잘못하면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국회 정무위원회, 서울 동대문구을)은 "차명거래 금지법은 불법 거래에 대한 징벌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령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나 전두환 전 대통령 등 불법으로 드러난 차명계좌에 대해 몰수와 추칭을 강화하는 것이 법 개정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밝혀진 차명계좌를 기준으로 볼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약 2만건, 이건희 삼성 회장은 1500건,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경우 700건이다. 2011년 저축은행 비리 사건에서도 차명계좌가 활용된 비중은 87.4%에 달했다.

민병두 의원은 지난해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줄곧 차명거래 금지를 위한 법 개정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CJ그룹의 차명계좌 비자금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차명거래 금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 가속화됐고, 지난 29일 마침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시행됐다.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차명거래 금지법 시행에 주요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히는 민병두 의원과 함께 법안의 의의와 향후 정책 방향을 모색해봤다.

Q.금융실명제가 도입된 지 21년 만에 대대적인 개편을 맞게 됐다. 차명거래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된 배경과 법 개정 작업에서 있었던 어려움은 무엇인가.

= 차명거래 금지법의 시행은 '조세정의'와 '투명사회'의 관점에서 매우 큰 진일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불법 목적과 연동된 차명거래에 대해서는 전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갖고 조심하게 될 것이다. 재벌 총수가 수천명의 임직원을 동원한 비자금,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한 소위 세(稅)테크 차원의 차명계좌도 상당 부분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본다.

개정법 시행 이후 불법 목적의 차명거래가 발견됐을 때 실소유자, 명의자, 금융회사 임직원 모두가 5년 이하의 징역,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단, 차명계좌를 명의자의 것으로 추정하되 실소유자가 재판을 통해 반증하면 달라진다.

이와 함께 실소유자 확인제도가 시행된다. 금융거래를 할 때 은행 창구 직원이 실소유자를 묻게 되며, 불법 목적의 차명거래는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법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고 밝히면서 공간이 열렸고 그 시기에 관련 법안이 많이 나왔다. 안철수 의원뿐 아니라 여당 간사인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도 공조했다.

지하경제 양성화가 안된 이슈들은 대부분 정치적이나 논리적으로 돌파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주식 양도차익 과세의 확대가 더뎠던 이유는 개인투자자들의 반발 때문이다. 자영업자 간이과세의 폐지가 어려운 이유도 영세 자영업자들의 반발 때문이다.

이것들은 지하경제 양성화나 과세 인프라 확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제도들이지만, 정치적·논리적인 어려움 때문에 법제화되지 못했던 것들이다.

정부에서 초창기에는 반대했지만 일정 시점이 지나며 수긍했다. 처음에는 차명거래를 증여의제하는 것으로 규정했으나 정부 측 입장과 차이를 좁혀 '증여 추정'으로 타협했다. 

Q.그동안 고액 자산가들이 절세를 위해 차명계좌를 이용하기도 했다. 일반인에게까지 차명거래 금지법의 파장이 확산되고 있는 데 대한 문제점은 없나.

= 일반인들이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다. 적법한 한도에서 차명계좌를 갖고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현행 증여세 감면 범위는 10년 합산 금액이 배우자 6억원, 자녀 5000만원(미성년자 2000만원), 부모 3000만원, 친족 500만원으로 설정돼 있다. 그동안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세(稅)테크'라는 명목으로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증여세를 초과하는 차명거래는 원칙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인과 대주주, 특수관계인, 임직원 사이의 차명거래도 전면 금지된다. 법인이 비자금이나 탈세 목적 외에 다른 이유로 차명거래를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 대주주가 법인 자금을 개인 명의로 옮겨 관리하는 행위가 불가능하게 됐다.

반면 동창회나 종친회, 교회 등 친목 모임의 공동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차명계좌는 예외로 인정돼 처벌 받지 않는다. 또 부모가 미성년 자녀의 금융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예금자보호법상 5000만원 보호 한도를 지키기 위해, 금융채무 불이행자(신용불량자)가 월급을 받기 위해 가족 이름으로 통장을 만드는 것은 허용된다. 위법에 해당하는 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즉, 현재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고 있는 경우 차명거래 금지법으로 인해 추가로 받는 불이익은 없다. 다만, 실정법상 위법한 행위와 연동된 차명거래를 운영하고 있는 경우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Q.차명거래 금지로 인해 탈세와 무관한 선의의 국민이 뜻하지 않게 피해입는 사례가 생기지 않을까.

= 한편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신용불량자들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다.

현재 신용불량자가 수백만명인데 다른 사람 명의로 통장을 개설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월급을 받아야 하나 걱정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신용불량자의 차명거래는 불법이 아니다. 탈세 목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신용불량자를 고용한 사업주가 이를 이용할 우려가 생긴다.

Q.차명거래를 금지하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현금이 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갈 우려는 없나.

= 차명거래와 차명계좌 자체가 지하경제의 영역이다. 세금의 관점에서 지하경제의 정의는 세금으로 포착되지 않는 경제영역을 의미한다.

그래서 차명거래 금지법은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지하경제에 있는 일부분이 다른 지하경제로 흘러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은 골드바(gold bar), 미술품, 예술품, 골동품 등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일부 현금은 이미 시장에서 이탈해 금시장과 보험시장으로 흘러갔다. 보험이 편법 증여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현금이 언제까지 장롱 속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사라졌지만 평생 장롱 속에 쌓아두지 않는 한 금시장이든 보험시장이든 투자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차명거래를 이용한 재벌 총수의 비자금 사건이 대폭 줄어들 것이다.

재벌 총수들은 보통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임직원을 이용해 차명계좌를 관리해 왔다. 앞으로는 임직원도 같이 형사처분을 받게 될 뿐 아니라 '돈'을 못 찾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아무리 재벌 총수라도 수천명의 임직원을 감옥 보낼 위험을 무릅쓰고 차명거래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Q.앞으로 개정 금융실명법이 바람직하게 정착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제들이 남아 있을까.

= 1993년 금융실명제는 매우 뜻깊은 것이었지만 '반쪽짜리' 법이었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해 가는데 몇 년이 걸릴지 예상할 수 없지만 앞으로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먼저 국세청과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의 집행 의지가 중요하다. 불법 목적의 차명거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감시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금융정보분석원(FIU)에서 STR(Suspicious Transaction Report)과 CTR(Currency Transaction Report)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반복적으로 고액 현금이 인출돼 의심이 가거나 2000만원 이상이 인출돼 전산에 자동 입력되면 국세청과 관세청에서 불법 여부를 조사할 수 있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는 징수 행정 강화로만 접근하는데, '과세 인프라 및 조세정의'의 관점에서 지하경제 양성화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일자리, 고령화, 양극화를 해결하려면 복지 증세는 불가피한데, 그러자면 조세정의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조세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내가 내는 세금이 정의롭고, 혜택에 되어 돌아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차명거래 금지법은 조세정의를 위한 큰 진전이다. 대한민국이 더 투명한 사회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