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얼렁뚱땅' 세법심의, 부작용의 책임은 누가?

#. 수 년전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의 역외탈세 논란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권 회장의 국내 거주자 해당 여부였다.

국세청은 확실한 증거물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었다.

권 회장이 국내 모처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으며 고교 동창회 등에도 얼굴을 비추며 거액의 후원금을 납부하는 등 '한국인'으로서 활동한 증거들이었다. 국세청은 이를 토대로 권 회장이 국내 거주자였고 국내에서 사업을 해 벌어들인 뒤 홍콩 등 조세피난처로 빼돌린 소득에 수 천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권 회장은 문제가 된 과세기간 동안 사업과 관련한 모든 결정은 해외에서 이루어졌으며 자신 또한 이 기간 중 홍콩에서 주로 거주했으며 한국에 거주한 기간이 1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한국인' 권 회장이 자신을 비거주자라고 주장한 이유는 전적으로 세금 때문이었다. 만약 권 회장이 국내 거주자가 아니었다면, 국세청이 밝혀낸 수 천억원의 세금탈루액 전액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불거졌던 '구리왕' 차용규 카작무스 대표의 탈세사건의 경우 과세전적부심사 단계에서 그가 영국 거주자인 것으로 가려지면서 과세가 취소되기도 했다.

이처럼 현행 법상 비거주자 신분이라면 국내에서 활동하며 벌어들이거나 쌓아놓은 소득과 재산에 대해서만 세금이 부과되고, 해외에 놓아둔 자산에 대해서는 과세당국이 손댈 제도적 장치가 없다.

즉, 역외탈세를 통해 손쉽게 납세의무를 회피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선박왕 권 회장 사건 등은 역외탈세와 관련한 정부당국의 시각과 접근법을 바꾼 계기가 됐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8월 세법개정안을 통해 현행 법상 '국내에 주소를 두거나 1년 이상 거소를 둔 개인'으로 규정되어 있는 '거주자' 판정기준을 고쳐, 183일(6개월) 이상 국내에 거주하거나 주소가 불분명하더라도(?) 가족과 직업, 자산상태를 고려할 때 183일 이상 국내에 거주할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도 거주자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법의 맹점을 악용한 '검은머리 외국인'들의 세금회피 시도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방침은 시작부터 어긋나게 됐다. 동일한 정책목표를 가지고 출발한 두 개의 세법개정안 중 하나가 '좌초'됐기 때문이다.

현행 거주자 판정 기준은 소득세법과 상속증여세법에 규정되어 있다. 정부의 정책목표가 온전히 달성되려면 두 세법 모두 개정이 됐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소득세법은 통과됐지만 상속증여세법은 '부결'되고 말았다.

이대로 둘 경우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하며 소득을 낸 검은머리 외국인이 국내에서 사망했을 경우 소득세법을 적용해 국내 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지만, 상속증여세법상으로는 거주자에 해당하지 않아 그가 해외로 빼돌린 자산에 대한 상속세 등을 한 푼도 부과할 수가 없게 된다.

□ 국회선진화법, '얼렁뚱땅' 세법심의 주범 = 지난해 도입된 '국회선진화법'은 12년만의 새해 예산안 법정시한 내 처리라는 '쾌거'를 만들며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너무도 중요한 개별 상임위의 법안심의권을 무력화시켰다는 지적도 함께 받고 있다. 예산안 자동부의제로 인한 각종 법안들의 '졸속심사' 논란이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낸 성과의 빛을 바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역외탈세 차단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담겨있던 상속증여세법의 부결은 논란의 기폭제다.

가업상속공제 확대를 둘러싼 정치적 이견 때문에 정작 시급한 개정이 필요했던 부분(거주자 판정기준 개정)은 아예 사장되어 버리는 충격적인 결과가 빚어졌다.

부결된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은 가업상속공제 확대가 전부가 아니었다.

상속 또는 증여시 적용되는 자녀공제액 상향조정 등 ‘친(親)서민형’ 제도 개편안도 파묻혀 버렸다. 또한 조세범에 대한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내용 등이 담긴 조세범처벌법 등 7개 세법개정안은 예산부수법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예 표결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예산안 법정시한 처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여야 정치권이 만든 희대의 '촌극'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진행된 세법개정안 논의 전 과정도 선진화와는 거리가 먼, 구태(舊態) 그대로였다. 예년과 달리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라는 올가미가 덧씌워진 것뿐이다.

조세소위는 7~8차에 걸쳐 정부입법안 및 의원입법안 등 230여개 세법개정안을 심의했다. 이 중 첨예한 이견이 맞붙었던 쟁점법안들은 예산안 법정처리 시한을 하루 앞두고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결국 심도 있는 논의는 더 이상 진행하지 않은 채 여야 원내대표들끼리 밀실에 앉아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른 '주고받기'를 논의한 끝에 9개 법률안에 대한 수정동의안을 만들었다.

그나마도 이 수정동의안 중 하나는(상속증여세법)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졸속의 결과물이다.

□ "국회선진화법, 손질 필요하다" = 중요도로 따지면 예산안보다 국민들의 호주머니와 직결되는 세법개정안이 더 중요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렇게 중요한 세법개정안을 졸속으로 심의한다는 것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조세법률주의를 훼손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까지 내놓고 있다.

예년처럼 예산안을 늦게 처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졸속으로 심의된 세법을 국민들 앞에 내놓는 행태는 두 번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선진화법이 이러한 상황을 부추긴다면,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선진화법의 부작용으로 파생된 상임위 기능 무력화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으로 법안심의기간을 늘리는 등의 제도적 보완장치를 통해 졸속심의 우려를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법상 정부는 회계연도 개시(1월1일) 90일 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세법을 비롯한 예산안과 결부된 법안들에 대한 심의기간은 60일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저런 정치일정과 소요되는 절차를 고려하면 활용이 가능한 심의기간은 더 짧아진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의 예산안 제출시기를 150일 또는 200일 전 국회에 제출토록 규정을 고치거나 법정처리 기한을 수정하는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신원기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간사는 "(국회선진화법이)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할 부분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라며 "전문성이 안 되면 시간이라도 투자해야 하는데, (예산안 법정처리 기한)12월2일로 맞춰놓은 걸 바꾸는 건 확실히 제고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좀 더 실질적인 심의기간을 줘야 한다. 기재위 의원들의 경우 세법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장치를 만들어 줘야한다"고 덧붙였다.

서복경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도 "기껏 두 달 동안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을 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간을 좀더 확보하는 대안을 고민하지 않으면 내년에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회 스케줄 전체를 재조정하는 방향으로 해서 국정감사를 상반기나 상시국감으로 당기고, (예산안 등은)최소한 9월1일부터 심의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