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적인 단기 경기부양책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자 정부가 구조개혁의 칼을 빼 들었다.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한 근원적 대책을 병행하지 않으면 경제체질 개선이 어렵다는 판단아래 금융·노동·교육·공공 등 4대 분야 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설 채비다. 구체적인 개혁조치들은 정부가 내놓을 ‘2015년 경제정책방향’에 반영될 예정이다.
핵심과제의 하나가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다. 지난달 24일 기획재정부 이찬우 경제정책국장은 “기업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정규직에 대한 해고요건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 비정규직 처우개선과 고용의 유연성이 균형을 잡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고 운을 떼었다.
바로 다음날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 때문에 기업들이 겁이 나 정규직을 못 뽑는 상황이다. 60세까지 정년을 보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정규직 과보호 사례”라고 이를 뒷받침했다.
이런 발언들이 전해지면서 노동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최 부총리는 “해고를 쉽게 하기보다는 임금체계를 바꾸는 등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서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임금격차, 노동시장의 경직성, 일부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 등은 노사 간, 노노 간 갈등을 일으켜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이라고 지적하고 독일의 사례를 들며 노동유연성 제고를 역설했다. ‘정윤회 문건 파동’에 묻혀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장관이 국장의 발언을 뒷받침하고 대통령이 마침표를 찍어 준 셈이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핵심 국정목표인데다가 대통령 신임이 두터운 최 부총리가 앞장서고 있어 어떻든 밀고 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노동시장 유연성의 핵심은 정규직을 쉽게 해고할 수 있게 하자는 데 있다. 대기업에서 해고가 어렵다보니 비정규직을 많이 쓰고, 그 결과로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현실진단이다.
그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중규직이다. 중규직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중간 형태로 고용보험을 비롯한 4대 보험 등 각종 처우는 정규직 수준이지만 해고요건이 완화되어 고용기간은 보장이 따로 되지 않고 기업과 근로자 사이의 계약기간에 따라 정해진다. 일종의 ‘기간제 정규직’인 셈이다.
정규직에 대해서는 임금과 근로조건 및 고용에서 유연성을 높이고, 비정규직에는 임금과 근로조건개선에다 고용안정성을 높인다면 두 부문 간 격차가 해소돼 하나의 큰 중산층그룹으로 통합시켜 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중규직으로 대통합되면 고용시스템과 성과시스템, 채용방식도 모두 유연하게 바뀔 수 있다.
문제는 정규직의 기득권 양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해 상향평준화를 향해 가야지 정규직을 낮춰서 하향평준화로 가는 방향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규직은 대우를 좀 좋게 해주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주장이다.
정규직의 고용유연성만을 추구하고 열악한 비정규직의 근로조건 개선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노동시장전체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문제는 정규직 해고의 절차적인 요건완화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노동법을 노사합의로 개정하는 일은 헌법개정보다 더 어렵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의 고용경직성이 선진국보다 높다고는 하지만 노동·복지환경은 단순 지수비교만으로 는 무리가 있다. 선진국은 채용시장이 열려있어 상대적으로 재취업이 수월하고 사회보장 등 사회안전망도 탄탄해 해직 후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우리의 경우 회사에서 잘리면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전전해야 하고 사회안전망도 취약하기 짝이 없다. 정리해고 외에도 권고사직, 희망퇴직 등으로 일터에서 쫓겨나는 일이 빈번하다. 일부 대기업 강성 노조의 기득권 챙기기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리해고든 일반해고든 해고문제는 사회안전망 등과 관련지어 종합적 판단이 요구된다.
사회적 합의 내지 여론의 지지 없이 노동시장 구조가 바뀐 사례는 국내외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현 정부의 사회적 합의기구인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에 민주노총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한국노총조차 “이대로라면 전면투쟁이다”라며 철수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게다가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유연성을 확보하는 등 새로운 고용형태를 만드는 일은 법률 개정사항이다. 국회 선진화법이 있어 여당이 물리력을 동원해 법안을 밀어붙일 수도 없다.
2016년이 총선이 있는 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 대통령에게 주어진 시간은 내년 2015년 1년뿐이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확대하는 방안은 임금 유연성 확대, 근로시간 유연성 확대, 그리고 과보호된 정규직의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수량적 유연성확대 등 세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도 임금피크제 등 임금 유연성과 유연근로시간제 도입 등 근로시간 유연성 확대는 노사 간에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비교적 높아 보인다.
최근 정부쪽에서 “정리해고 요건을 손대진 않겠다. 고용경직성 보다 임금경직성이 더 문제니 호봉제와 성과급제, 임금피크제를 섞는 복합 임금체계를 검토하고 있다”는 등 유연성을 보이는 것도 이런 사정들을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노사정이 충분한 소통과 대화를 통해 우리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대타협을 이루어 내기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노동시장구조개혁을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밥그릇싸움으로 몰고 가 노노간 전쟁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첫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고용형태를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비정규직은 없어져야 할 일자리로 치부하는 세태가 바로 비정규직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중구조를 타파하려면 괜찮은 시간제 일자리도 많이 만들어야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는 취업취약계층에게 더 안정적인 일자리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적극적 인식도 필요하다. 하루에 시간제 일자리를 두, 세 군데 뛰는 사례도 선진국에서는 드물지 않다.
‘아젠다 2010’으로 상징되는 독일의 노동개혁은 경제, 교육, 세금, 노동시장, 의료보험, 연금 등의 분야를 모두 포괄했다. 여야는 지난 주 공무원연금 개혁을 위한 국민대타협기구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노동시장개혁은 물론이고 공무원 연금개혁, 지속 불가능한 무상복지의 축소 등 국민 모두가 미래를 위해 각기 고통을 분담하는 한국의 ‘2015 국민대타협’을 이루어낼 수는 없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