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증권사 대구지점에서 브로커리지(주식중개·위탁매매) 업무를 하던 김하준 씨. 지난해 7월 회사로부터 희망퇴직을 권고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본사는 김씨에게 "매일 아침 서울 본사에서 교육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매일 출퇴근하던 김씨는 반 년 만에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B증권사 본사에서 근무하는 유미진 씨는 임신·출산을 이유로 희망퇴직 명단에 올랐다. 퇴직을 거부하자 팀장은 유씨에게 "지점 방문판매부(ODS:Outdoor Department)에 들어가라. 태블릿 PC 하나주고 뺑뺑이를 돌릴테니"라며 사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희망퇴직 이후 노동조합 지부장과 유씨를 포함한 18명이 방문판매부로 발령 났다.
자본시장의 메카(mecca)로 불리는 서울 여의도에 '희망퇴직'이라는 칼바람이 불고 있다. '희망'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깊은 '절망'이 존재하고 있다.
수년째 불황에 시달리는 증권사들은 영업소를 포함해 지점을 대폭 축소시키고, 희망퇴직에 동의하지 않는 직원들에게 부서 강제 배치 등 부당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2015년, 해를 넘긴 인수·합병(M&A)이 산적한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권에서는 "정부가 대형 증권사 위주의 M&A를 부추기고, 불공정 경쟁을 유도하는 정책을 통해 중소형 증권사를 죽이며 희망퇴직자를 양산한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 1년 동안 증권사 지점 16.1% 사라지고, 직원 10명 중 1명 잘려 = 7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4년 3분기 말 기준, 61개 증권사(현재 59개)의 영업점포는 전년 동기 대비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영업점포 형태 중 국내지점은 1년 동안 1509개에서 1264개로 16.1% 줄어들었고, 국내영업소는 53개에서 34개로 절반 가량 감소했다. 지점 수를 줄이면서 같은 기간 업계의 판매관리비는 1837억원이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동안 업계 종사자는 4만1222명에서 4250명이 줄었다. 증권사 직원 10명 가운데 1명 꼴로 회사를 그만뒀다는 의미다. 이 중 정규직원은 4700여명 줄은 반면 계약직원은 548명 늘었다.
조사 결과 상당수 증권사가 지점 통폐합 과정에서 '희망퇴직'을 함께 실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별로는 유안타증권(옛 동양증권)이 가장 많은 수인 760명의 직원을 내보냈고, 삼성증권은 2014년 지점을 95개에서 72개로 축소하며 근속 3년 이상 직원 300여명의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하나대투증권은 6개 지점을 폐쇄하며 직원의 8%인 145명을 잘랐다.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은 지난해 6월 합병을 추진하며 각각 412명, 196명의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이 밖에도 신한금융투자는 90여명을, 부국증권은 4개 지점을 축소하며 47명을 내보냈다.
□ ODS 발령, 전략적 성과관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직원 내보기 시도 = 소형 증권사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대형 증권사에 몸담았던 직원은 계약직으로 같은 회사에 다시 고용되는 사례가 빈번하지만, 소형 증권사의 희망퇴직자는 계약직으로도 남기 어렵다. 때문에 희망퇴직과 함께 부당한 조치를 당하는 사례가 많다.
최근 2년 반 동안 LIG투자증권은 12개의 지점 중 2개만 남기고, 120여명의 직원 중 70여명을 잘랐다. 지난해 9월, KB금융지주와 LIG투자증권 모회사인 LIG손해보험의 합병 윤곽이 잡히자 추가적으로 증권사 직원 12명에게 희망퇴직 권고 후 해고 통보를 했다.
한만수 사무금융노조 LIG투자증권 지부장은 "매년 12월 실적 평가를 한다. 하지만 합병 문제가 내부적으로 구체화된 지난해 9월 말 실적 평가를 해 희망퇴직을 당했다. 실적보다는 임신·출산, 노조활동 등이 실질적인 이유가 됐다. 12명 중 2명만 다시 계약직으로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대신증권은 지난해에만 35개 지점을 통폐합했다. 또 비상경영을 이유로 전략적 성과관리 체제를 만들었다. 실적이 총 수익 60%(성과 목표 80%) 이내에 들지 못하면 3단계 경고 후 대기발령 등 조치가 가능하다. 대신증권은 실적 부진 직원을 대상으로 지난해 5월 희망퇴직을 실시해 6월 13일자로 304명의 직원이 여의도에서 짐을 쌌다.
이남현 사무금융노조 대신증권 지부장은 "기관 중 성과 목표를 보면 1·2단계가 80%로 동일하다. 하지만 업황을 보면 성과 목표 80%를 채우기가 너무 어렵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를 주면서 목표에 미달한다고 자르는 것은 회사가 구조조정을 쉽게 하기 위한 작업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HMC투자증권은 지난해 6월 희망퇴직을 거부한 직원들을 ODS로 발령 냈다.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인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은 방문판매를 통해 금융투자상품을 판매한 후 손실이 발생했을 때, 투자자가 청약을 철회하면 판매자가 손실분을 부담해야 하는 구조다.
IBK투자증권도 지난해 12월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희망퇴직 거부 직원에게는 '원격지 발령' 명령을 내렸다. 자택이 인천인 경인지점 직원을 분당지점으로, 자택이 분당인 서초지점 재직자를 경인지점으로 발령내기도 했다.
□ 대형화 부추기는 금융정책, 소형사 구조조정 양산 = 금융투자업계는 올해에도 구조조정을 피해가지 못할 전망이다. 진행 중인 증권사 M&A가 여러 건인데다, 통합 증권사의 경영 효율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또 정부의 금융정책은 대형 증권사 중심의 M&A를 활성화 해 구조조정을 유도하고 있다.
지난해 동양증권은 대만 유안타그룹에 인수돼 유안타증권으로 사명을 바꿨다. NH농협증권과 우리투자증권의 합병으로 지난해 12월 31일 NH투자증권이 출범했다. 해를 넘긴 M&A도 여러 건이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증권 매각을 진행 중이다. 현대증권 입찰은 지난해 8월 예정됐지만 여러 차례 연기돼 오는 26일 본입찰이 다시 진행될 예정이다. 또 지난 1일 통합 산은이 출범하면서 KDB대우증권 매각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 전문가들은 "대형사 M&A를 유도하는 정부의 정책 개입으로 올해 구조조정과 희망퇴직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성태경 한국기업평가 선임연구원은 "올해도 개별 증권사 수준에서 지점 및 인력 축소 등 구조조정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인력 축소로 인해 업무상 운영 위험이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수 사무금융노조 정책국장은 "정부가 지난해 내놓은 증권사 M&A 활성화, NCR(영업용순자본비율) 개편, 프라임 브로커 육성 등 대형화 정책 일색"이라며 "중소형 증권사들은 어려운 환경과 정부의 퇴출 압박을 받고 이는 구조조정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해 4월 발표한 NCR제도 개선 방안에 따르면 NCR 산출 기준은 '영업용순자본/순위험액'에서 '(영업용순자본-총위험액)/업무단위별 필요유지 자기자본'으로 변경됐다. 이에 따르면 자기자본 1조원 이상인 증권사의 NCR은 2014년 476%에서 1140%으로 높아졌지만, 자기자본이 3000억원 미만인 소형 증권사는 614%에서 181%로 낮아졌다.
이명순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과장은 "금융투자산업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불황인 시장에서 증권사가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증권사 수 증가를 억제하고, 증권사별 특화를 유도한 것"이라며 "대형 증권사와 소형증권사 간 차별은 없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