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공직자의 취업 제한을 강화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일명 ‘관피아 방지법’)이 올해 3월 30일부터 시행되지만 ‘관피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관료와 범죄집단을 의미하는 마피아의 합성어인 ‘관피아’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대표적인 신조어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벌어진 세월호 참사와 땅콩회항 사건을 겪으면서 특정 산업의 주요기관으로 옮긴 관료 출신들이 과거 인맥과 직책을 악용해 부정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관피아에 대한 비판론이 거세졌다.
관피아의 퇴장은 “무조건 공무원은 안 돼”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인력풀’을 제한하는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관피아가 빠진 자리에 ‘정피아(정치권발 낙하산 인사)·교피아(정치권을 기웃거린 교수들)’만 늘렸다는 비판도 나온다. 개인과 조직 특성에 대한 고려 없이 출신 성분만으로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진영 논리에 빠져 국가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최근 김재홍 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의 대한투자무역진흥공사(코트라) 사장에 취임했다. 관료 출신이 조직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지 다시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공무원 자리였는데…정치권·교수·언론인 출신이
지난해 공무원이 산하 기관에 취업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산하기관만 봐도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 국정홍보비서관 출신인 백기승 씨가 ,한국전파진흥협회 부회장은 강철희 고려대 교수가, 개인정보보호협회 부회장은 이영덕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코디마) 신임 사무총장은 신재춘 명지대 교수가 각각 선임됐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는 반응과 의외의 인사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백기승 원장은 탁월한 정무 감각으로 행자부·검찰청·경찰·국정원 등 유관부처가 많은 KISA 수장으로서 리더십이 기대됐지만, 인터넷 분야에 몸담지 않아 낙하산 논란이 있었다. 개인정보보호협회 이영덕 부회장 역시 언론사와 언론중재위 경력외에는 뚜렷한 업무연관성이 없어 입방아에 올랐다. 신재춘 코디마 신임사무총장은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재직경력으로 전문성은 인정받았지만 새누리당 경기도당 대변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홍문종 국회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새누리) 위원장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다.
이들 자리는 공무원 출신들이 있던 자리였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은 방통위 기조실장 출신인 이기주(현 방통위원)씨, 한국전파진흥협회 부회장은 정보통신부 국장 출신인 차양신씨, 개인정보보호협회 부회장은 정통부 국장 출신인 황중연씨, 코디마 사무총장은 방통위 국장 출신인 정진우 씨가 각각 전임자로 활동해왔다.
현재 유관 협단체 관료출신으로는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전에 선임된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노영규 부회장,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설정선 부회장, 한국TV홈쇼핑협회 이근협 부회장, 한국정보통신공사협회 황의환 부회장 정도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KISA나 코디마, 전파진흥협회 등은 미래부나 방통위의 핵심 업무를 함께 나눠 하는 곳인데 일단 공무원 출신은 아예 배제하다 보니 전문성보다는 정치권력과의 인맥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도 있었다”면서 “전문성이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공무원 출신이 그래도 객관적인데 뭔가 거꾸로 가는 느낌 ”이라고 평했다.
◇지역정보개발원장,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 정보화진흥원장은 어찌 되나
한국지역정보개발원, 한국정보통신산업진흥원, 한국정보화진흥원 등 수개월째 기관장이 공석인 곳들은 이르면 이달 중 신임 원장을 선임한다. 지역정보개발원의 경우 조만간 이사회를 열고, 손연기 한국정보통신기능대학 학장(전 한국정보문화진흥원장)과 정국환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전 행정자치부 전자정부본부장) 중 한 사람으로 결정할 예정이다. 하반기에는 EBS 사장 임기가 만료돼 신임 사장과 감사 선임이 예정돼 있다.
이들 자리에 소위 관피아가 갈지, 정피아나 교피아가 갈지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무엇보다 인재 풀을 대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정치권력이 정부 산하 기관장 자리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에게 나눠주는 이른바 코드 인사는 새로운 일은 아니다. 다만 ‘관피아는 안 되고, 정피아나 교피아는 괜찮다’는 식의 논리는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지난해 퇴직 공직자에 대해 취업심사를 한 결과 전체 260건 중 209건은 취업가능, 51건은 취업제한으로 결정해 취업제한율이19.6%로 집계됐다. 이는 2011~2013년 동안 취업제한율 평균 6.7%에 비해 12.9%포인트 상승하는 등 3배 가까이로 높아진 수준이다.
한 공무원은 “공무원 연금 개혁으로 복지가 줄어드는 판인데, 재취업조차 불가능해 출구조차 없는 상황이라 더 견디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는 “공무원이냐 아니냐를 떠나 능력·성실성·전문성·인화협조 리더십 이런 것을 갖춘 인물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공무원이 더 잘할 수 있는 직종도 있고, 전혀 전문성이 없거나 갑의 역할만 하던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은행에 공무원이라고 무조건 가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면서 “공무원이니까 연관되는 유사 직종에 절대 가선 안 된다는 것은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다. 업의 직능과 성격에 따라 분류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려면 획일성에서 벗어나는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원장은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나 정보화진흥원의 경우 공공적 성격이 큰 준정부적인 정책 집행기관”이라면서 “이런 경우 공직경험을지닌 사람이 더 잘 해 낼 수 있다. 낙하산으로 불리든, 재취업으로 불리든, 인력 재활용으로 불리든 관계없이 개인과 조직 특성에 맞게 인재를 찾을 수 있어야 국가 전반의 역량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