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개혁의 상징인 공무원연금개혁이 여야 정략에 휘둘려 ‘반쪽 개혁’ ‘무늬만 개혁’에 그칠 공산이 커졌다.
새누리당과 정부, 청와대는 지난 주말 심야에 비공개로 고위 당정청 회동을 갖고 여야가 합의한 공무원연금 개정안을 그대로 추진키로 했다.
월권과 ‘세금폭탄’ 운운하며 여야 합의안의 발목을 잡았던 청와대가 뒤늦게 여야 합의를 주어진 여건 속에서 도출한 최선의 안으로 평가한 것은 의외다. 청와대 정무수석이 국회에 대해 “개혁 취지를 심각하게 몰각(沒覺)한 것”이며 “이를 막지 못한 데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며 물러났다.
당·정·청은 특히 “최초의 사회적 대타협 기구에서 전원 합의했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문제가 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은 국민 동의가 필요하므로 사회적 대타협 기구를 구성해 논의키로 방침을 굳혔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가 오는 28일 본회의에서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밝혔지만 걸림돌은 남아 있다.
“더 이상 정부에 소득대체율 50% 명시를 요구하지 않겠다”면서도 “65세 이상의 기초연금을 소득 하위 90%(현재 70%)까지 확대하면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 50% 수준을 지킬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기초연금은 이름만 연금이지 사실상 세금과 다름없고 바로 증세로 연결돼 이 또한 격렬한 논란이 예상된다.
하지만 여야의 분위기로 볼 때 5월 임시국회에서 공무원연금개혁안 처리에는 일단 청신호가 켜졌다. 청와대 수석의 사퇴에 대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조 수석의 책임은 전혀 아니다”며 국회선진화법 상황에서 여야 간 어쩔 수 없는 게임으로 간 것임을 다시금 강조했다.
문제는 개혁의 내용이다. 여야합의안은 한마디로 개혁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6년 뒤면 연금적자를 세금으로 메워야하는 규모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퇴직 후 받는 연금 수령액의 기준인 지급률을 1.9%에서 1.7%로 0.2%포인트 내리지만 20년에 걸쳐 깎는 것이어서 장기근속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연금 납부 대상 소득상한액도 노조 주장대로 715만 원으로 결정돼 고액수령자도 줄지 않았고, 최소 10년만 부어도 연금을 탈 수 있게 됐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이 40%대인데 공무원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여야 타협 전에 62.7%이었고 개정안도 61.2%로 여전히 높다. 국민의 세금 지원 없이는 지속 불가능한 구조다. 7년 후 국민세금 100만원중 2만5000원을 공무원연금으로 내준다는 계산도 나왔다.
애초 의도했던 구조개혁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채 국민적 관심이 엉뚱하게 국민연금 쪽으로 넘어가는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공무원노조의 여의도 시위구호가 어느 날 갑자기 ‘공무원연금법 개정 절대반대’에서 ‘공적연금 개선’으로 바뀐 것도 이런 ‘떠넘기기 전술’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여야가 애초 공무원연금 개혁에 나선 것은 국가재정의 파탄을 막고 국민연금과의 격차를 줄여보자는 의도였다. 특히 정부와 여당은 ‘국민연금도 했는데 공무원연금도 못할 게 없다’며 공무원들도 고통분담 차원에서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의 고강도 연금 개혁에 협조를 주문했다.
따라서 개혁의 초점은 어떻게 더 내고 덜 받는 구조로 바꿀 것인가에 맞춰졌어야 했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많이 양보하기는 싫고, 국민연금과의 형평성이라는 명분은 무시할 수가 없으니 자신들이 손해나는 폭은 줄이고 대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올림으로써 차이가 적게 나는 모양새를 만드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여야가 결속된 100만 공무원과 가족 표를 의식하며 공무원노조에 끌려 다닌 결과다. 야당이 막판에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통과 조건으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안을 들고 나온 것 또한 2000만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정략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라는 연막탄 속에 공무원연금개혁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격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에휴, 공무원연금만 생각하면…”이라고 한숨을 쉬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다”고 되받는 상황도 벌어졌다.
박대통령은 “이번에 못하면 시한폭탄이 터질 수밖에 없다”며 정치권에 대한 압박 강도만 높였을 뿐 자신이 나서 정치권을 설득하고, 필요한 경우 야당 의원들과 개별 면담도 불사하는 적극성과 개혁을 위해 몸을 던지는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다. 공무원 연금개혁은 4대개혁의 첫 단추였다.
공무원 연금개혁이 최소한의 개혁에 그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국회 공무원연금 개혁 특위가 사회적 대타협 기구를 만들면서 이해 당사자인 공무원을 개혁의 주체로 포함시킨 것부터가 잘못이다.
사회적 대타협기구는 시한 종료 하루 전에 실무기구라는 것을 구성해 합의안 도출을 떠넘겼다. 실무기구 위원 9명 가운데 민간인 교수 2명을 빼고 7명이 공무원 단체 대표이거나 임명직 공무원이다. 민간인 교수 역시 공무원연금과 비슷한 성격의 사학연금의 수혜자가 될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방안이 그대로 여야 합의안이 됐다.
정부 여당은 이달을 넘기면 여야가 앞으로 수년간은 공무원연금 개혁을 협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여야가 합의한 수준으로라도 공무원연금을 바꾸지 못하면 그나마 기대했던 70년간 333조원의 재정절감 효과도 물 건너간다. 개혁의 불발보다는 차선(次善), ‘맹탕개혁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국민연금은 어차피 5년마다 변화된 환경을 반영해 재정추계를 새로 한다. 다음번 재정추계는 2018년이다. 명목 소득대체율 인상 문제는 그때 가서 논의해도 충분하다.
앞으로 사회적 합의기구에서 중장기적으론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의 통합 방안은 물론 사학·군인연금 등 공적연금 개혁을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기구에는 각 직역단체, 노동계, 재계 대표와 나중에 연금을 부담할 청년층 대표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 통합이 세계적 추세임을 감안해 이 둘을 장기적으로 통합하는 근거라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국민연금은 젊은 세대가 든든히 떠받쳐야 세대 간 연대가 형성돼 지속 가능해지는 제도다. 국민연금에 가장 중요한 자산은 믿음이다. 자신이 낸 보험료보다 더 큰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
야당이 국민연금을 ‘용돈연금’이라고 폄하하고 주무장관이 ‘세대간 도적질’ 운운하는 상황에서 신뢰가 쌓일 리 없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시늉에 그치고 국민연금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정치권과 정부가 국민연금의 신뢰만 허문 꼴이 됐다. 총선이 바로 내년인데 개혁의 첫 단추를 이런 식으로 꿴 마당에 여타부문 개혁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지 절로 한숨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