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감독이 싫어하는 단어가 여럿 있을 것이나, 으뜸은 아마도 '잔루만루'일 것이다. 주자가 꽉 들어찬 상태에서 주자를 한 명도 못 불러들였거나 추가점을 낼 수 있는데도 더 내지 못했다는 것이니 말이다.
예컨대 노아웃 만루상황에서 맨 먼저 타석에 선 타자가 내야플라이나 삼진으로 아웃된 후, 다음 타자가 내야 땅볼을 쳐 병살을 당하면 한 점도 못 뽑고 이닝이 종료된다. 그럴 때 감독은 죽을 맛일 것이다. 덕아웃에 앉아 이 광경을 처연하게 쳐다보는 투수는 또 어떤가. “좀 잘해서 편하게 던지게 할 것이지”하는 원망이 절로 든다. 바로 다음 회에 맥이 쭉 빠진 상태에서 던지니, 무사만루의 위기를 넘겨 기가 펄펄 살아난 상대팀에게 된통 얻어맞기 십상이다.
1988년부터 2009년 6월까지의 프로야구경기를 토대로 뽑은 비공식통계에 따르면 무사만루에서 1점도 뽑아내지 못할 확률은 14%, 1사 만루에서 그럴 확률은 34%다. 이 확률에 걸리면, 경기 내내 아쉬움의 잔영이 팀 전체에 짙게 드리워져, 그 후 조금만 잘 안 돼도 “오늘은(오늘도) 지겠구나”라는 절망감이 엄습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감독이 잔루만루를 좋아할 리 없다.
잔루만루의 진한 아쉬움은 야구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주자만루 상황은 여건의 성숙을 함의한다. 여건이 성숙됐음에도 결정적 한방을 못 날려 잔루만루가 연출되는 상황은 세상사에도 흔히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점포 중심의 전통적 금융서비스에서 벗어나 인터넷, 모바일 기반 플랫폼의 장점을 이용하여 송금·결제·자산관리 등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른바 핀테크(FinTech) 분야다.
우리나라 인터넷망은 세계 최고라 할 정도로 촘촘히 깔려 있고 속도 또한 세계 최고다. 이런 인프라를 토대로 IT강국을 건설했음은 자타가 인정해 온 터. 그럼에도 금융과 IT가 결합된 핀테크 분야 세계 100대기업에 이름을 올린 우리 기업은 하나도 없다. 우리 핀테크서비스가 작년에야 비로소 출시됐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전국적 초고속 광케이블망, 세계적 PC·스마트폰 보급율과 세계적 포털 가입율이라는 세 주자가 누상을 가득 채웠음에도 ‘금융보안 규제’의 철폐라는 결정적 한 방이 없어 잔루만루가 연출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중국의 온라인쇼핑몰 알리바바는 이미 10년전에 ‘알리페이’라는 핀테크서비스를 출시했다. 론칭 당시에는 구매대금 결제서비스만을 제공했으나 2007년 이후 그 영역을 대출·투자·보험·은행 등 금융서비스로 확대했다. 2014년 7월 현재 회원 8억2천만명을 확보했다. 알리페이가 이베이의 ‘페이팔’과 함께 글로벌 핀테크 시장을 양분했다는 말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실증한 대목이다.
우리의 잔루만루 상황을 우습게 본 것일까. 아니면 기회로 여긴 것일까.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한국형 알리페이를 만들고자 한국에서 협력파트너를 물색하겠다”고 호언했다. 우리 주요관광지의 2만여 가맹점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결제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알리페이가 내국인을 겨낭한 ‘코리안페이’까지 론칭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하다. 이제 갓 태동한 우리 핀테크서비스는 고사될 수 밖에 없다.
뒷맛이 더욱 찝찝한 것은 우리가 애써 누상에 내보낸 세 주자들이 엉뚱하게도 알리바바의 세계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는 대목. 자칫 안방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나 잔루만루 상황이라 하여 낙담하기는 이르다. 그것이 9회말 상황이 아닌 한, 아직 득점과 승리의 기회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전을 위해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