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할복 흔적이 배에 후천적으로 남아
얼마 전 후암가족과 함께 일본 히로시마를 다녀왔다. 히로시마 성을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H씨. 예순 살이었던 그는 한국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한국 역사와 문화에도 박식했다. 예전에 일본에 갈 때면 보디가드처럼 늘 내 곁을 지켜 주곤 했었다.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때 그도 그곳에 있었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런 그가 위암으로 위의 7분의 3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평소 몸에 해롭다는 것은 입에도 안 댔기에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은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철저하게 모든 것을 금욕하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가 수술을 한 후, 나는 H를 병문안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건축업에 종사하며 황소 같은 힘을 자랑하던 그가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는 멀리서 온 나를 반갑게 맞으며 내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선지 유쾌한 농담을 건넸다.
“지난 번 말씀대로 저는 전생에 사무라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수술한 부위를 보여줬다. 배 위에 크게 댄 거즈와 붕대를 보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심각한 상황에 웃음이 터진 이유는 평소 둘이 주고받던 농담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는 심각하게 자신의 전생을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로 할복으로 해서 죽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할복해서 죽었다는 내 말에 놀랐는지 “저는 그렇게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라며 허허 웃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이상한 꿈에 시달렸다. 오래된 성곽에 무릎을 꿇고 배에 천을 감은 뒤 큰 대도로 자신의 배를 가르고는 푹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 배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전생처럼, 또 꿈처럼 배를 가르게 된 것이다.
“전생에 할복해서 죽었다고 현생에도 그렇게 죽으란 법은 없습니다”라며 나는 그를 위로했다. 고베 대지진 때 살아난 것처럼 위를 제거한 대수술에도 그는 오뚝이처럼 살아났다. 이후 배의 상처를 보며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전생을 궁금해 했다.
만약 사무라이였다면 어느 성의 무사이며 전생에 어떤 연유로 할복을 했는지 소소히 알고 싶어 했다. 또 전생에 자신의 칼에 쓰러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원했다.
전생의 흔적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처럼 수술 등 후천적으로 흔적을 갖게 되기도 한다. 비록 전생의 상흔은 배에 깊게 남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구명시식 결과 그의 명은 전생보다는 길었기 때문이다.
전생의 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다음 생이 조금 나아지길 바라서이다. 나아지는 것이 반복되다 보면 해탈은 아니더라도 편안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