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중에 행복하게 살라고 그런거니까 조금만 견뎌줘.”
대체 누가 남자는 현실지향적, 여자는 미래지향적이라고 했나. 의외로 연인에게 ‘우리의 찬란한 앞날’이라는 명목으로 연락 못하고, 바쁘니 데이트도 주 1회로 한정하겠다는 등 “목표를 이룰 때까지 바쁜 것을 이해(라고 쓰고 강요로 읽는다)해달라”는 말을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 남자가 흔하다.
학업, 업무, 대외활동, 봉사활동, 어학공부 등 자기계발에 올인하는 남자들은 어쩜 그렇게 열정이 넘치는지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도 더불어 강한 에너지를 느끼고 동기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그들의 연인은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 여자친구인 ‘나’는 그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치어리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내야 한다.
애교가 넘치는 깨알같은 카톡은커녕 생존신고만 제대로 받아도 안심하고, 밥은 먹었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걱정돼 전화해봐도 ‘지금은 좀 통화하기 곤란하다’며 툭 끊는 전화에 상심하기 일쑤다. 데이트 약속도 거의 그의 바쁜 스케줄에 맞춰 짜야 하며, 이마저도 언제 ‘파토’날 지 몰라 ‘5분 대기조’ 모드로 휴일을 날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렵사리 남자 친구를 만나 조금 서운한 티를 내면 “나도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거야, 나중에 다 보상할게”라는 상투적이지만 어쩐지 안심되는 말에 꽁해 있던 마음이 풀린다. 심지어 이 얘기에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보고 있구나’하고 안도한다.
이런 상황이 남일 같지 않게 익숙한 당신은 앞날만 보고 사는 ‘미래소년’과 만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성공지향적이고, 야심 차 확실히 남자다운 매력을 풀풀 풍긴다. 학창시절 공부를 잘 해서 선생님의 예쁨을 받는 전형적인(공부외길!) 모범생과는 또 다르다. 그들은 세련되고 열정이 넘치며, 게다가 능력있어 보인다.
그런데 결정적인 한방이 없다. 자신의 문제에 치우쳐 여자친구에게 감성적으로나, (아직 미래준비 중이니까) 금전적으로나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다보니 내세울 수 있는 카드가 ‘앞날’밖에.
어쨌든 그들도 사람이다보니 외롭긴 매한가지. 바쁜 와중에도 연애를 시작할 짬은 낸다. 문제는 여자친구를 사후관리하는 데서 트러블이 발생하는 것이다. 미래소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연인과 즐기는 시간보다 자신을 계발하는 게 그들의 우선순위다. 가끔 이를 서운하게 여기는 여자친구가 갑갑하고 귀찮기도 하고…. 잠깐 미안함을 느끼더라도 ‘난 우릴 위해 미래를 준비하고 있으니까’라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준다.
연애란 거창하다기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좋아하는 감정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만 모든 여자가 으리으리한 데이트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호사스런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데이트를 하는 것보다 사소한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도 적잖다.
함께 있는 시간 자체를 즐기고 싶은 것이다. 함께 걷는 여름 밤공기의 풍경, 그때 불던 잔잔한 바람, 남자친구의 앞모습보다 의외로 멋져보이는 옆얼굴 같은. 그때의 별 의미없는 행동이나 말도 분명 설레는 포인트가 된다.
실제로 주변의 미래소년을 만나는 여자들은 대개 여리고 감성적인 ‘같은 여자가 봐도 사랑스러운 타입’인 경우가 많다. 이 둘은 생리적으로 코드가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조합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말하면 소소한 감성보다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여자는 ‘미래를 준비하는’ 남자보다 이미 안정적인 남자를 찾아간다. 결국 선물도, 감정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미래소년과 신파극을 찍는 것은 상냥하고 다정한 사랑꾼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가끔 자신의 상황을 평강공주에 빗대 표현하는 여자들이 있는데, 두 케이스는 절대로 다르다. 평강공주는 적어도 자신이 온달을 출세시키겠다는 억척스러운 목표지향적인 여자고, 미래소년의 연인은 남자의 야망에 끌려다니는 데서 큰 차이가 난다. 사랑에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이런 케이스는 연인이라기보다 ‘모자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중에 효도하겠다’며 엄마의 희생에 눈 감는 불효자나 진배 없다.
그가 말한 ‘보상’이라는 걸 도대체 언제 받을 수 있을까. 심지어 그 보상이란 게 단순히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뜻하는 건지, 어떤 형태가 있는 물건인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당신밖에 없어’라는 말 한마디에 그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남자 혼자만 ‘앞날’을 위해 정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유교사상 탓인지 남성의 입신양명을 위한 준비에 더욱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 더 많다.
먼 앞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현재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지금 당장의 사랑받는 느낌도 연애에서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현재의 내가 그와의 지금의 관계에서 행복해야 한다.
봄처럼 말랑말랑 나긋나긋해야 할 연애가 혹독한 겨울 같은데도 ‘대신 나에겐 그와의 행복한 미래가 있을 거야’라며 억지로 미래를 함께 바라보고 있는 척하고 있다면, 미래가 아닌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이런 것들을 견딜 가치가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재가 쌓여 미래가 된다. 현재에도 나를 소중히 여길줄 모르고 공수표만 날려대는 사람이 목표를 이룬다고 해서 180도 변하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높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