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남자보고서] 배려를 ‘조공’으로 아는 남자

“언제부턴가 내가 맞춰주는 게 아주 당연한 줄 알아.” 이제 겨우 연애한 지 3개월째 된 20대 후반 여성 H는 점점 자신의 ‘배려’를 일상처럼 여기는 남자친구에게 섭섭함만 쌓이고 있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연인관계에서 너무 배려하면 결국 독이 된다는 인생 선배들의 경고를 적잖이 들을 수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 잘해주니까’ 질린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남녀 불문하고 취향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보통 여자가 버림받고 남자는 떠난다. 이런 일을 겪은 여성은 ‘앞으로 나쁜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데, 아이라인과 립스틱만 진하게 칠한다고 해서 남자를 휘두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고 이런 경우 보통 ‘배드걸 메이크업’을 한 헌신짝이 되기 십상이다.

요즘엔 연애를 머리로 하는 탓인지 ‘내가 우위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 사람이 적잖다. 자기도 모르게 끊임없이 상대방을 재고, 연애를 이기고 지는 게임으로 여기며, ‘손해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그러다보니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잘 해주는 상대는 함부로 해도 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H는 평소에도 남들을 잘 챙겨주는 성격에 ‘어미새’로 통한다. 다정다감한 모습과 여성스러운 성격에 끌린 남자친구는 뭇 남성이 그렇듯 H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300% 이상의 에너지를 냈다. 하지만 사귀고 난 뒤부턴 상황이 완전 뒤바뀌었다.

‘내 여자’가 됐다고 생각해 잡은 물고기엔 밥주지 않는다는 심보인지 처음과 같은 열정을 굳이 내세우지 않은 모양이다. 반면 H는 적극적인 애정 공세로 나서 지금껏 만난 남자 중 처음으로 ‘내 남자’라는 확신이 들자 오히려 정성을 다해 하나에서 열까지 자질구레한 것을 챙겨줬다. 자취하는 남자친구에게 반찬을 갖다주기도 하고, 월급일 직전까진 그의 경제사정에 폐를 끼칠까봐 데이트비용까지 전담했을 정도다. 주변에선 ‘요즘 보기 드문 여자친구’라며 칭찬 일색이지만 정작 남자친구의 반응은 ‘뭘 그런 것 가지고 호들갑이냐’다.

‘바쁘다,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남자친구를 배려해 점점 스케줄은 어느새 그의 일정에 맞추고 있다. H는 딱히 남자친구만을 생각해서라기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맞추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다. ‘퇴근했어’라는 남자친구의 카톡이 오기 전까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회사일 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신경써주는 것이다. 퇴근 후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자신이 남자친구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이 그에겐 ‘저자세’로 느껴졌는지 그는 자신의 위치를 ‘갑’으로 인식, 소위 말하는 갑질에 나섰다. H는 평소 자신의 의견은 피력할 줄 아는 등 ‘착한여자 콤플렉스’와도 거리가 멀다. 단순히 연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해준 배려를 ‘조공’(朝貢)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H도 사람인지라 섭섭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럴 땐 단호하게 해주던 걸 끊는 게 답’이라는 이야기에 독하게 맘먹고 배려를 멈추자 돌아온 것은 ‘변했다’는 말이었다.

보살 같던 H가 폭발한 계기는 사소한 일 때문이다. 종종 기프티콘으로 커피를 선물하던 H에게 남자친구가 ‘어제 야근해서 피곤한데 커피 좀’이라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평소엔 아침에 출근준비한다고 연락도 잘 없던 사람이 단순히 ‘커피’ 때문에, 그것도 당연히 사줄 거라고 생각하고 카톡을 보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괘씸했다. 심지어 애정 가득한 말투도 아니고, 단답형이라니….

H는 심지어 자신을 탓한다. 유독 남자친구에게만 섭섭함을 느끼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들이나 가족을 챙겼을 땐 별 생각이 없지만, 남자친구에게만은 예외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뭘 바란다거나, ‘너를 이만큼 신경쓰는 나를 알아줘’하는 건 아니지만, 점점 자신의 배려가 당연시되고, 일상화된다면 기운이 쭉 빠질 수 있다.

배려는 사소하지만 누구나 ‘나를 위해’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쓰지 않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H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3개월째 ‘혼자’ 배려하고 있다면 보상심리가 나타나는 것도 당연하다. 평소 ‘고맙다’는 말은 들었냐고 묻자 “생각해보니 처음에만 그랬지 점점 요구가 늘어가더라”며 씁쓸해했다.

혹자는 H의 행동에 대해 ‘남자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이제와서 난리냐’, ‘결국 네가 남자가 당연시하게 만든 것 아니냐’며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애정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남녀를 불문하고 분명 연애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언제부터 ‘잘해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 걸까.

수필가인 고 전혜린 교수는 “부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서로 ‘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타인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예의도, 감사도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화났을 때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옮겨서는 안되는 것처럼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H는 “연애는 그냥 단순히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단순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내 생각이 순진했거나 짧았나보다”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젠 더이상 남자에게 잘해주지 않을거야’라며 어설프게 나쁜 여자가 되겠다며 선언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