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韓非子). 그는 춘추전국시대 법가(法家)를 대표한다. 그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군주에 대한 절대적 복종만이 국가질서 유지와 부국강병의 수단이 되며, 이를 위해 율령을 엄히 세워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그런 법가사상이 진시황의 대제국 진(秦)의 국가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법가사상을 토대로 진시황은 전국을 군현(郡縣)으로 나눈 후 각 군현에 중앙관리를 파견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군주의 직할지 외의 국토를 제후들의 분봉지로 나눠주고 그 영역 안에서 이들의 자치와 세습을 허용했던 봉건제를 폐지한 것. 통일화폐를 쓰도록 함과 아울러 문자와 도량형도 통일했다. 로마에 버금갈 정도로 넓고 잘 포장된 도로를 건설하고 거기에 맞게 마차와 수레의 규격도 통일했다. 모든 게 획일화되고 규격화된 것이다.
진은 그럼에도 겨우 16년만에 멸망했다. 왜 그랬을까. 엄한 법령의 냉혹한 집행이 백성, 특히 복속된 제후국 백성들에게 무시무시한 규제로 느껴져 민심이 이반된 것. 거기에다 진시황의 통치를 패도(覇道)정치로 본 유가(儒家)까지 강력 반발했다. 급기야 유가의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까지 감행했다. 그러니 아무리 대제국이라 하더라도 무너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진이 망하자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툰다. 유방에게는 아전(衙前)에서 시작하여 명재상 반열에 오른 소하(蕭何), 탁월한 군사전략가인 장량과 후에 토사구팽(兎死狗烹)된 대장군 한신이 있었다. 특히 소하는 탁월한 행정가이자 살림꾼이었다. 그는 항우와의 전쟁에 몰두한 유방·장량·한신을 후방 지원하면서 천하통일에 필요한 민심을 얻는데 주력했다. 그러니 항우가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자결할 수 밖에 없었을 터.
소하는 진시황의 공과를 깊이 분석한 끝에 엄격하고 냉혹한 진의 법령을 모두 폐지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적용했다. 사람을 죽인 자, 사람을 다치게 한 자와 도둑질한 자에게만 형벌을 내린 것이 그것. 형벌이 그 정도로 단순하고 관대했으니, 다른 제도도 그랬을 것이라는 점 또한 넉넉히 짐작된다. 한나라 황실이 4백년이나 유지된 것도 그의 온유·관대한 정책 덕분이라는 것이 사가들의 평가이다.
국가경영에 관한 한 소하와 한비자는 대척점에 서있다. 원인은 무엇인가. 한비자는 성악설을 주창한 순자(荀子)의 제자다. 그런 그가 인간을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로 보고, 믿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다른 것은 순자가 교육을 인간 본성을 바로 잡는 수단으로 본 반면, 한비자는 엄격한 율령 집행을 수단으로 본 점이다.
이에 비해 소하는 맹자(孟子)의 성선설을 따른 듯하다. 천하의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나, 인간 본성을 선한 것으로 보고 믿어야만 그토록 관대한 정책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고 안 믿고의 차이가 정책, 특히 규제정책에 관한 극단적 견해차의 주된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세제개편안이 공표됐다. 특히 눈길 끄는 대목이 있다. 수출중소기업에 대한 수입부가가치세 납부유예제도 도입이 그것이다. 지금은 원자재 수입시 수입부가세를 납부한 후 부가세 신고시 그만큼을 공제 또는 환급 받는다. 그랬던 것이 일정 요건을 갖춘 수출중소기업의 경우 수입시 수입부가세를 징수하지도 않고 부가세 신고시 공제 또는 환급도 하지 않는 쪽으로 개정된다는 것. 수출중소기업이 최소 40일 이상 수입부가세만큼을 사업자금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납세의무는 4대의무의 하나다. 그래서 규제개혁대상도 아니다. 행정규제기본법 제3조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획재정부가 납세자를 믿고 납세편의 제고를 위해 절차적 규제를 과감히 풀어버린 것이다. 믿지 못했다면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명재상 소하를 떠올리게 한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