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신분제 사회에는 '음서제(蔭敍制)'가 존재했습니다.
음서제란 고려·조선시대 때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공신 등의 상류층 자손이나 친척을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직계존속의 지위를 자손대대로 계승해 '관직 세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 관직에는 음서출신자가 과거급제자에 비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음서출신들은 집안 세력에 따라 벼슬을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했습니다.
수 백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도 '현대판 음세제' 논란은 있습니다.
2010년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 특별채용 비리'와 최근 일부 대기업의 고용세습 규정, 로스쿨 판 음서제 등입니다.
그런데 2015년 상반기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고를 기록할 만큼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무사들과 수험생들 사이에서도 '현대판 음서제'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아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세'란 아버지가 세무사인 수험생이나 세무사를 지칭하는 속어입니다.
세무사 개업은 시장 경쟁이 치열해 실무능력보다 고객 유치 능력, 즉 '영업력'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아세들은 분명 자신의 힘으로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음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주변 세무사 보다 출발점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일부에선 아세가 공정한 경쟁을 제한하고 경쟁 질서를 와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가 계층 이동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고소득 전문직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계층과 직업을 대물림하는 현상이 심화되는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합격만 하면 탄탄대로" VS "합격해도 걱정" = 실제 세무사 학원에서는 아버지가 세무사인 수험생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영업권을 그대로 이어 받을 수 있어 시험 합격만 하면 시너지를 발휘 할 수 있을 것 같아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버지가 세무사라고 밝힌 한 수험생은 "시험 합격 후에는 아버지의 노하우와 영업권을 전수받아 상대적으로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아세 수험생은 "아직 아버지가 현직에 계셔 주위에 아세라고 말은 안한다. 학원에서 주위사람 얘기 듣고 있으면 아세가 꽤 많다"며 "학원에 같이 다니는 친구의 아버지도 세무사인데 아버지와 서로 모르는 사이에도 한 두 다리 건너니까 다 연결 되더라"고 전했습니다.
한편 아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주변을 의식한다는 아세 수험생도 있었습니다.
동료 수험생들이 경계하는 면이 있다고 밝힌 아세 수험생은 "같이 공부하는 수험생들끼리도 아버지가 세무사라는 것을 쉽게 밝힐 수는 없다"며 "주변 수험생들이 아세가 시험 합격 후 연착륙이 빠르다는 것을 의식해 아세라는 것을 부러워하고 경계한다"고 말했습니다.
학원에서 만난 일반 수험생들도 아세 수험생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면 남들보다 앞선 출발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아세들을 따라 잡기가 어렵다고들 했습니다.
3년째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한 수험생은 "스터디에 아는 아세 수험생이 있는데 그 수험생은 오전에 아버지 사무실에서 기장 거래처 3~5개 정도 관리하면서 실무 감각을 익히고 오후에는 학원에서 공부한다"며 "아세들은 합격만 하면 우리와 출발선이 다르니까 솔직히 부럽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일반 수험생은 "실제로 아세 수험생은 열심히 하는 사람도 많지만 일부 아세는 아버지가 시간이 걸려도 붙기만 하라고 했다고 하더라"며 "그래서 그런지 아세 수험생들 일부는 긴장감이 부족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 "아버지가 완성한 판, 자녀가 꿀꺽?" = 세무사 시험에 합격한 현직 세무사들은 아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다른 동료 세무사들은 개업을 해도 업계의 상황 때문에 쉽게 연착륙하지 못하는데 아세들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법인에 근무하는 한 세무사는 "아세는 우리 업계의 귀족 같은 존재 일 것"이라며 "아빠가 세무사면 모든 판이 깔려있고, 아세는 그 판에서 놀기만 하면 된다"고 부러워했습니다.
개업 2년차인 한 세무사는 "일이라는 것이 사수가 누구냐에 따라 업무능력이 올라가는 것"이라며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스승 없고 제자 없는 것이다"고 부러워했습니다.
아세들을 가리켜 일종의 '가업상속'이라고 이야기한 세무사는 "일을 시킬 때 가족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며 "사무실 직원관리도 자식한테 맡기면 좋고 아버지가 은퇴 후 영업 위주로 백업하면 거래처 이탈도 줄일 수 있다. 일종의 가업상속"이라고 했습니다.
아세는 따라잡기 힘든 존재라고 밝힌 세무사는 "아세는 아버지의 영업라인과 조언, 인맥이 결합된 결정체"라며 "거기에 아버지 밑에서 일한 노련한 직원들까지 합치면 아세는 다른 일반세무사보다 최소 10년 이상 앞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세라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능력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말한 의견도 있었습니다.
개업 후 자리를 잡았다는 한 세무사는 "아버지가 세무사라고 합격 후 모두 잘 나가는 것은 아니다"며 "아무리 아버지가 거래처를 많이 갖고 있어도 요즘 시험 출신이 기장료와 조정료를 덤핑해 거래처를 지키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거래처들도 경기 때문에 폐업도 많고 기장료, 조정료 미수도 많다"며 "아세라면 합격 후 무조건 고속도로라 생각하면 대단한 착각이고 모든 것은 능력에 따라 천자 만별이다"고 밝혔습니다.
□ '수십 년 쌓은 노하우' ··· "남 주기는 아까워" = 그렇다면 세무사 자녀들을 둔 세무사 아버지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자녀들이 세무사가 된 세무사 아버지들은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자녀가 전문직을 갖게 된 것도 기쁘지만 오랫동안 관리한 거래처를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국세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세무사로 개업한지 10년이 넘었다는 한 세무사는 "주위에 기업 임원으로 일하는 친구들 외에는 마땅한 직업이 없는 현실인데 나는 세무사로 오랫동안 일하고 있어 행복하다"며 "그동안 열심히 운영했던 사무실을 가족에게 물려 줄 수 있게 되어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개업 20년이 넘었다고 밝힌 다른 세무사는 "아들이 세무사 시험에 합격해 법인에서 근무 중 이다"며 "요즘은 개업시장도 정착이 어렵다고 하는데 현재 있는 거래처를 몇 년 후에 아들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내가 잘 관리해서 인계해주면 아들에게 큰 선물이 될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