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2만명 시대를 맞아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변호사 업계가 세무사, 변리사 등 타 전문자격사 단체의 협공으로 '사면초가'에 놓여졌다.
업무영역 다툼.
이른바 '밥그릇 싸움'이라 불리는 이들 전쟁의 핵심은 '자동자격 부여 여부'다.
변호사 자격자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세무사와 변리사 자격을 놓고 각 단체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변호사에게 세무사, 변리사 등 다른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의 법안이 다수 발의됐지만 법조인 중심으로 채워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상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이 변호사의 변리사·세무사 자격 자동취득제도 폐지법안을 제출하면서 세 단체간의 공방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변호사 출신의 법제사법위원장의 손에서 변호사의 '밥줄'을 끊는 법안이 발의된 점에 관계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
변호사 자격 취득시 세무사, 변리사 등의 자격을 갖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특혜라는 취지에서 발의된 이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상태다.
□ 세무사·변리사 "변호사와 우린 엄연히 달라" = 일단 세무사들은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어느 정도 자신들의 업역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만명에 육박하는 세무사 시장 역시 포화상태에 이르렀기에 누군가에게 '파이'를 양보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현행법상 세무사 자격은 세무사 시험 합격자와 변호사 자격자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지난 2012년 대법원은 세무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변호사는 세무사로 등록할 수 없다고 판결, 변호사의 세무사 자동자격 부여 제도는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기존에는 공인회계사에게 세무자 자격을 자동 부여하는 조항도 있었지만 2012년 법 개정과 함께 삭제됐다. 국세 행정 분야 10년 이상 근무 등 일정 조건을 채운 세무공무원에게도 세무자 자격을 주던 제도는 1999년 세무사 1차 시험을 면제해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세무사들은 자동자격 폐지 뿐 아니라, 틈틈이 조세소송권 확보를 위한 물밑 작업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변호사 업계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변리사들도 최근 변호사에게 변리사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변리사법을 개정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18일 법조계와 변리사 업계 등에 따르면 대한변리사회는 지난 6일부터 모든 변호사에게 변리사 자격을 주는 변리사법 제3조를 폐지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특허청에 등록된 변리사 8885명 중 자동 자격을 부여받은 변호사는 5379명으로 전체의 60.5％를 차지했다.
변리사들은 "특허 등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특수목적 법률전문가로서 지난 60년간 이 땅의 지식재산권 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해 왔다"며 "기술과 특허를 모르는 변호사에게 변리사 자격까지 주는 것은 비정상이며 소비자의 올바른 선택권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변리사들은 자체 홈페이지와 함께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서명 청원 운동을 전개 중이며 현재 3700여명이 참여했다.
□ 위상 낮아지는 변호사들…취업난 '극심' = 위기에 봉착한 변호사 업계는 '돌파구'를 찾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타 전문자격사 단체의 협공에 점점 위축되어 가는 모양새다.
이상민 의원의 개정안에 반발한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는 지난 4월 변리사 제도 폐지를 요구하며 맞불을 놨다. 지식재산 분야의 특성화 교육을 받은 이공계 출신 변호사들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변호사에게 전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변협은 "과거 변호사 수가 부족할 때 저렴한 법률서비스 제공 필요성으로 변호사 고유 업무영역 중 최소한의 범위에서 예외를 인정해 변리사 제도를 뒀다"며 "로스쿨 출범으로 지식재산 분야의 전문성을 지닌 많은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어 변리사 시험을 통한 변리사 배출 제도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변협의 주장에 변리사들은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자연과학에 문외한이고 지재권 제도도 잘 알지 못한다"며 "변리사 업무와 변호사 업무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지 주종 관계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한편, 변협은 최근 청년 변호사의 취업난을 해소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하며 변호사 업계의 어려운 현실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변협은 지난 11일 변호사만 국가소송을 대리하도록 하는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새누리당 여상규 의원을 통해 발의했다.
현행 국가소송 관련법에는 변호사뿐 아니라 법무부 장관이 지정하는 법무부 직원 또는 행정청 직원이 소송을 수행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는데, 이를 없애고 변호사만 소송을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변협은 법률시장에서 심각한 구직난 탓에 취업을 못하는 청년 변호사의 고용 창출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변협은 같은 날 보도자료를 통해 "법률시장에서도 심각한 일자리 부족 현상으로 많은 청년 변호사가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발의가 실업상태에 직면한 청년변호사의 고용창출에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 변호사 업계의 취업난은 올해 들어 한층 더 심각해진 상황이다.
법무법인 소속과 사무실 개업이 모두 어려워지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기업의 법무팀 취업이 인기를 끌고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기업들은 과거 변호사 자격증만 있으면 간부급으로 영입했지만, 이제는 경력이 없는 변호사의 경우 법무팀 대리급으로 채용되고, 국회의원실에 취업하는 변호사 역시 9급 보좌진으로 채용되는 등 변호사들의 위상이 현격히 낮아진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최근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들이 늘어나 청년 변호사들의 취업난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변호사 사무실의 취업 경쟁률도 갈수록 높아져 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