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국정화(國定化)를 둘러싼 논란이 온 사회를 ‘이념 전쟁’ 내지 ‘진영 싸움’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정치권과 교육계, 시민단체들이 편을 갈라 이념공방에 몰두하면서 교과서 개편을 통해 역사 교육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이냐는 교육의 목표는 아예 실종됐다.
정부·여당은 ‘올바른 교과서’가 어떤 것인지, 그것을 만드는 길이 왜 꼭 국정화 밖에 없는 지에 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한 채 ‘국정화 강행’ 만을 외치고 있다.
야당은 아직 집필도 시작하지 않은 교과서를 놓고 ‘친일·유신 옹호 교과서’가 될 것으로 미리 재단하고 극한투쟁도 불사할 기세다. 교과서 국정화를 ‘역사 쿠데타’로 규정하며 장외투쟁을 시작했고, 국정화 관련 예산은 물론 내년 예산안과 노동개혁 법안까지 보이콧할 수 있다는 으름장도 놓고 있다.
각 대학 역사학과 교수들은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성명을 잇따라 내고 있다. 야당이 예산과 법안을 볼모로 장외투쟁을 이어가면 4대 개혁을 비롯해 모든 국정이 발목 잡힐 게 뻔하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교육부 차관의 전결 사안으로 교육부가 고시만 하면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다. 역사교과서는 교육의 문제이고 어디까지나 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 여기에 정치가 끼어든 것이 문제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8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검정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8종) 중 교학사 발행 한국사에 대해 역사 왜곡 및 우편향이 심하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시작됐다. 야당은 교학사 한국사 검정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며 교육부를 항의 방문했고 교학사 교재에 대한 불매운동도 시작됐다.
그러자 교육부는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모두를 대상으로 수정·보완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교학사를 제외한 다른 출판사의 한국사 집필진은 교학사의 한국사 문제를 다른 출판사까지 ‘물타기’ 한다는 이유로 교육부 방침을 거부했다.
교과서 기술 내용의 사실적 오류나 왜곡과 관련한 내용을 놓고 논쟁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배워야 할 교과서를 놓고 이념세력 간 ‘역사전쟁’의 양상으로 비화됐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필요한 부분은 조속한 수정·보완을 교육부에 지시하면서 국정화는 급기야 ‘대통령의 어젠다’가 됐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뀐 것은 다양한 교과서를 만들어 교육의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조치였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달까지만 해도 국정화에 목숨을 걸지 않았다. 그는 교육적 관점을 견지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대통령의 다그침과 여권의 정치적 계산에 떠밀린 인상이다.
새누리당은 현재의 검·인정 체제에서는 적지 않은 교과서가 왜곡·편향된 ‘분열의 역사관’을 학생들에게 주입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격하하거나 북한을 옹호한 구체적인 서술 사례들을 제시하며 정부가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제공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대한민국 국사학자의 90%가 좌파’, ‘현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가르친다’면서 당대표가 ‘역사전쟁’을 선포한 상태다.
정부는 현행 검인정 체제로는 편향성을 잡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국정화를 결정했다. 하지만 국정화에 따른 문제는 하나같이 녹록치가 않다. 국정화로 인해 박근혜 정부 남은 임기 내내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이에 따른 국정운영의 차질이 당장의 부담이다.
‘좌편향’ 교과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건국 과정·친일·북한·독재 등의 평가를 놓고 또 다른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국론분열과 이념대립이 격화될 수 있다. 과거 국정교과서가 권력자 입맛에 맞게 씌어지거나 정치적으로 왜곡된 전례도 없지 않다.
지금 와서 ‘올바른 교과서’를 만든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있을 수가 없다. 역사교과서에는 ‘널리 알려지거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통설(通說)이나 ‘다수가 지지하는’ 다수설이 있을 뿐 올바른 정설(正說)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실은 무한해 이들 전부가 역사 기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를 기술할 때 과거의 사실들을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관(史觀)이다.
역사가가 역사를 서술하는 바로 그 순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파당(派黨)적일 수밖에 없다. 본래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허구이고, 사관에 따라 다양한 역사가 있을 뿐이다. 단일한 사관을 고수하거나 강요함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놓치거나 은폐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이 역사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교사가 교과서 외의 보충교재를 통한 토론식 수업진행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역사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정부가 단일한 역사교과서만을 만들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정부 혹은 특정 정치세력에 의한 역사 기술(記述)의 독점과 특정한 역사관 및 이념의 주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검인정 제도 아래서 역사교과서는 같은 사건을 서술하면서도 필자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이 다를 수 있고, 그 해석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양한 교과서가 나오는 것이야말로 검인정 제도의 장점이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요체인 다원주의다. 정부가 주장하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단일 국정교과서’일뿐이다.
한국사는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와 정통성을 바탕으로 하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과를 골고루 기술해야 한다.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자극하고 열린 태도를 길러주는 교과서가 더 좋은 교과서다. 하나의 역사교과서에 다양한 사관을 모두 담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 고난 속에서 이룬 자랑스러운 성취의 역사를 자라나는 세대에 제대로 가르쳐 나라의 미래 동력으로 삼고자하는 충정은 이해가 가지만 자긍심만으로 서술한 단일 역사 교과서를 사용하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북한 말고 또 있을까.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다양한 생각과 의견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소통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여야는 주요 선거 때마다 이념을 고리로 지지층을 끌어들였다. 여야가 총선을 겨냥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지지세력 결집수단 삼아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한다면 거센 역풍을 맞게 될 것이다. 국정화를 밀어붙여 2017년 단일 교과서가 교실에 배포되더라도 그해 말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역사 교육을 이념전쟁의 늪에서 속히 구해내어야 한다. 검인증 교과서의 검증을 보다 강화하고 생산적 논의를 통해 이념을 넘어 다양성 확장의 계기로 삼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