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새 대북제재 결의 이후 북핵 문제 대응 전략과 방향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쟁의 막이 올랐다. 결의안이 채택되면 북핵문제는 고강도제재의 이행, 한․미․일의 독자적 추가제재,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논의, 중국의 비핵화·평화협정 논의 병행론 등 여러 변수들이 뒤엉켜 주변국들의 수(手)싸움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한․미․일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안보리 결의의 철저한 이행과 독자 제재 등 지속적인 대북압박으로 북한의 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중국은 강력한 제재에 동조하면서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의 병행을 적극 주장하며 대화복귀에 나섰다.
대북제재 결의안이 채택되기도 전에 사드체계의 한반도 배치와 북-미 평화협정을 둘러싸고 미묘한 기류 변화가 감지됐다. 미·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중국의 평화협정·비핵화회담 병행 제안에 완전히 문을 닫지 않고 사드 배치 문제도 미국이 급급해하지 않는다고 한 발 물러서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중국이 북한 제재에 동참하는 대신 미국은 사드 배치를 조정하는 쪽으로 전략적 거래를 했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중국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한반도 비핵화(非核化)와 평화협정' 병행 협상을 제안한 데 이어, 북한과 미국이 최근 평화협정 문제를 놓고 비공식 협의를 가진 사실도 드러났다. 미 국무부는 논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병행 협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시사했다.
아시아태평양을 놓고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과 중국이 한국의 안보 문제도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타협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사드 배치는 안보와 국익에 따라 검토해 나갈 것”이라던 박근혜 대통령의 선언이 무색하게 됐다.
중국은 처음부터 대북제재가 북한 체제를 붕괴하는 수준이 돼서는 안 되며, 협상테이블로 복귀하도록 설득하는게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고 실제 이를 관철시켰다.
북핵 6자회담의 중국 측 수석대표 우다웨이(武大偉)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그는 서울에 와 “지난 25년간 북핵문제를 다뤄오면서 지금이 의미 있는 전환점이고 전환점이 돼야한다” “중한이 공동으로 노력해 한반도 평화안정대국을 수호하기로 했다”며 '대화'에 거듭 방점을 찍었다. 자칫 대북제재 국면이 협상국면으로 변질될 우려도 제기된다.
새 대북 제재안이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끌어낼 정도로 초강도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20년 만에 가장 강력한 제재' 수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외화수입을 효율적으로 차단하는 데는 도처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들이다.
감시가 허술한 양국 국경 지대에서의 무역은 북한주민의 '생명선'이기도 하지만, 북한 정부에는 주요 현금 확보 통로로 간주되고 있다. 북한의 주요 외화 수입원인 국외파견 노동자 문제를 건드리지 못했고 오히려 줄어드는 북한의 석탄·철광석 수출을 제한시키는 데 그쳤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류수출도 제재망을 피해갔다.
중국은 대북제재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타격을 가하는 데 집중돼야 한다고 고집하며 제재가 무기 분야 이외에 일반 무역 분야로 확대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대북 원유 공급 중단조치가 빠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심을 모았던 '세컨더리 보이콧'(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 단체·개인제재)역시 포함되지 않았다. 북한주민생활에 직접 타격을 주는 제재는 피해야 한다는 중국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중국이 양보했다기보다는 중국 입장이 상당히 수용됐다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그나마도 새 제재안은 러시아의 '몽니'로 채택이 늦어지고 있다. 대북제재를 미·중이 주도하는 데 대해 소외감을 느껴온 러시아 입장에서 앞으로 6자회담 재개를 비롯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다자 차원 논의가 전개될 경우에 대비해 존재감을 높이고 영향력을 행사할 외교적 여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우리정부는 '끝장 결의'를 이끌어 내기위해 안간힘을 쏟았지만 그 과정에서 공들여 쌓아온 한·중관계가 손상되고, 개성공단 폐쇄로 남북소통 채널이 완전히 끊어지는 등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새 대북제재가 북한의 숨통을 끊어놓을 만큼의 '끝장' 제재로 귀결되지 않은 채 평화협정 협상국면이 본격화하는 일도 전혀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가 가장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의 하나다.
'선(先)비핵화-후(後)평화협정'은 지난 25년간의 대북 협상 틀의 대원칙이었다.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평화조약을 상정할 수 없고, 더 더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면서 평화조약을 맺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핵화를 위한 조치를 먼저 취해야만 북한과 평화협정을 위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고 주장해온 미국이 이 같은 전제조건을 포기하고 '핵무기가 단지 한 요소에 불과한 포괄적인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우리로서는 충격이다. 중국 우다웨이 수석대표가 언급한 '25년만의 전환점'과 궤를 같이한다.
당장은 대북 제재가 이어지겠지만 다음 달 말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면 미중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 문제가 논의되면서 향후 북한과 평화협정-비핵화 대화가 시작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평화협정은 북한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 북-미 수교 등과 연동돼 있어 우리 입장에선 북핵 해결 전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평화조약을 맺는 일은 우리로선 악몽이다.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수용하는 대신 미국이 사드 배치에 유연함을 보인 지난달 23일 미중 외교장관 회담은 한국의 한심한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중국 관영 환추시보는 얼마 전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면 국가적 독립성을 잃게 돼 대국의 게임에서 바둑돌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사설로 조롱했다. 미국은 사드배치 속도조절에 나섰는데도 '사드 띄우기'에 급급한 우리 국방부의 처지가 너무도 안쓰럽다.
인구 5000만 명에 세계 10위권에 근접한 경제 규모를 가졌음에도 우리 모두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 쓸 수 있는 카드 한 장 제대로 못 가진 채 미국과 중국만 쳐다보는 한심한 상황이다. 한국은 휴전협정 당사국도 아니고 전시작전권은 지금도 미국 손에 있다. 남북관계도 빙하기여서 협상국면을 우리가 주도할 공간이 없다.
군사위주의 안보관에 치우쳐 비군사적인 수단들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고 평화정착을 위한 전략적 사고가 결여된 채 강대강 대응은 군비경쟁과 군사적 충돌 위험을 부채질할 뿐이다. '끝장제재'가 제대로 먹히지 않은 채 평화협상국면에 진입할 경우 우리가 '비핵화우선'만 외치며 언제까지 반대만 할 수 있을까. 최상의 한미관계만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가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 전략을 갖고 있는지 실로 걱정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