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심판원장의 '월권(越權)'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조세심판원의 대표적 문제점 중 하나다.
세무대리시장 참여자들은 이 부분이 심판원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보다 심각하다는데 동의표를 던지고 있다. '독립성', 심판원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이 대의원칙을 훼손시키는 주범으로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심판원장의 월권, 그 실체는 무엇일까. 매우 심플하다. 독립적인 권한을 갖고 조세불복 사건에 대한 가부여부(인용 혹은 기각, 재조사 등)를 결정하는 상임심판부의 권한을 무력화시키고, 사건 재검토(이하 재심)를 지시하는 것이다. 재심 지시는 말 그대로 상임심판부의 결정방향을 바꾸라는, 압력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심판원 및 세무대리시장 안팎의 지적이다.
심판원이 어디까지나 '공무원 조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고 수장인 원장의 지시는 말 그대로 무소불위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심판원 안팎에서 제기되어 왔던 문제다.
법에도 없는 권한을 행사하는 수장의 행태가 심판원이라는 기관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권력가' 행세하는(?) 심판원 수장들
조세불복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한은 사건을 담당하는 상임심판관들이 행사한다.
조세불복 사건이 심판원에 접수되면 담당 심판부가 배정되고 담당 심판부 소속 조사관이 사실 관계를 조사한다. 이 과정에서 과세당국 및 납세자들의 소명을 수집해 사건조사서를 만들면, 상임심판관들이(조세심판관회의 = 주심+부심, 비상임심판관) 인용 또는 기각, 재조사 등 결정을 내린다. 방향이 결정된 사건은 조정검토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조세심판관회의에서의 결정내용은 원칙적으로 변경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장이 재심을 요구, 심판원장과 상임심판관 전원, 심판원장이 지정하는 상임심판관과 동수 이상의 비상임심판관이 참여하는 '조세심판관 합동회의'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심판원장의 재심 요구는 사실상 법적 근거가 없는 월권행위라는 것이 세무대리시장 참여자들의 의견이다.
실제로 현행 세법(국세기본법 등)에는 심판원장의 재심 권한을 규정한 문구가 없다. 오직 조세심판원 운영규정에 '중요한 사항에 대해 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재심 요구를 통해 조세심판관 합동회의에 부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다.
법 규정도 아닌 기관운영 규정에 적힌 이 문구 한 줄이 심판원장에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조세심판관회의에서 처리된 조세불복 사건은 총 6842건. 이 중 120건이 합동회의에 부의된 것으로 집계됐다.
절대적인 숫자는 많지 않지만, 이 정도 숫자만큼 심판원장의 월권행위가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세무대리인은 "심판관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심판원장이 수차례에 걸쳐 재심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며 "이런 형태로 합동회의에 회부해 당초 결정, 특히 심판부에서 인용결정을 내린 부분을 기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심판원이 공무원 조직인데 최고 수장의 의견에 상임심판관들이 강하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또한 합동회의에 참여하는 비상임심판관들도 심판원장이 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합동회의는 '원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심각성 인식 못하는 '고인 물', 심판원
일각에서는 '전문성의 함정'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상임심판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은 전문성을 보유한 심판원장이 재임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세무대리인은 "그동안 다수의 심판원장들이 자신의 경력에서 비롯된 전문성을 앞세워 재심 권한을 행사해 왔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기형적 형태"라며 "심판원장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큰 문제지만 전문성을 과신하는 것도 문제"라고 촌평했다.
실제 지난해 9월 현재 심판원장(역대 포함)의 전문성을 나타내는 조세분야 경력은 평균 25년으로, 5명의 상임심판관이 보유한 평균 조세경력(14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심판원도 심판원장의 재심 권한 행사를 이런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는 측면이 다분하다. 조세심판관회의 결정의 오류를 찾아내는 '게이트키핑(gate keeping)' 절차이기 때문에 심판원장의 재심 권한 행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고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장치로서의 역할만 감안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 재심 권한 행사가 시장에서 왜곡된(?) 평가를 받고 있다면 심판원 스스로 이 해결책을 고민했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쉽게 말해 재심 권한을 행사하고 싶으면 심판원장 직무범위를 세법에 명확하게 규정해서 하라는 이야기다.
세무대리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서 '원장의 뜻대로 합동회의에 부의해 기각처리를 유도한다'는 이야기가 한참 전부터 나오고 있다면 이미 심판원 결정에 대한 신뢰성이 상당히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세심판관 합동회의에 부의, 결정 내용이 변경된 건수(인용->기각)는 2013년 10건, 2014년 22건, 2015년 27건 등 해마다 상승곡선을 그려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심판원장의 재심 권한 행사를 제한해야 만 심판원을 바로세울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심판원장은 법원장의 역할처럼 인사 등 기관운영 행정만 담당하고 상임심판관들이 결정한 내용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도록 법적 명확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조세전문가는 "심판원장의 권한에 대해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 심판원장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심판결정이 내려졌다며 재심 요구를 남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부실결정의 가능성을 명분으로 재심 권한을 무한대로 허용하는 것은 잘못됐다. 부실결정이 나오지 않도록 인력을 대폭 확충하는 등 사건조사 단계부터 신경을 쓸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심판원장의 역할이 아니겠느냐. 그런 역할은 뒷전에 두고 권한만 행사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