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배임 아냐…집주인이 애초 알고 있었다면 금융사 권리 계속 유효"
금융회사 대출을 받아 마련한 보증금을 내고 전셋집에 들어간 세입자가 나중에 전세계약이 끝나 보증금을 금융사 몰래 집주인에게 직접 돌려받았다면 잘못이 있는 걸까.
대법원은 이처럼 금융사가 질권을 설정한 보증금을 금융사 모르게 받았다가 배임죄로 1·2심에서 유죄를 받은 30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질권은 채무 변제를 받을 때까지 그 채권의 담보로 물건이나 재산권을 유치하는 것을 말한다. 변제가 안 되면 물건 등을 처분해 우선 변제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음식값이 모자라 식당 주인에게 시계를 맡기는 것, 거액을 빌려주면서 상대방이 가진 고가의 보석을 넘겨받는 것 등이 해당한다. 이 때 질권을 설정해준다고 한다.
대법원 3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8일 질권이 설정된 전세보증금 반환청구권을 질권자 몰래 변제받은 혐의(배임죄)로 기소된 박모(36) 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수원지법에 돌려보냈다.
세입자는 전세보증금을 집주인에게 주고 집을 구한다. 돈이 부족한 세입자는 금융사에서 전세금을 대출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보증금 반환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통상 세입자는 이 권리에 금융회사를 질권자로 설정해준다.
질권자인 금융사는 세입자가 대출금을 갚지 않아도 전세보증금 반환청구권을 행사해 주인에게서 대출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이 사건에선 세입자가 금융사 몰래 집주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아 문제가 불거졌다. 금융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자신의 권리(질권)를 잃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세입자를 배임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는지 논란이 있었다.
대법원은 집주인이 이미 질권 설정을 승락했으므로 권리는 여전히 남아있어 금융사에 손해가 없으므로 세입자를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채무자가 질권 설정을 승낙했다면 질권자는 채무 변제와 상관없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며 "질권 설정자가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의 변제를 받았다고 해서 질권자에게 손해를 가하거나 손해 발생의 위험을 초래했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씨는 2011년 7월 전세보증금 1억6천만원짜리 오피스텔을 얻으면서 H금융사에서 1억2천만원을 빌렸다. 집주인에게 돌려받을 보증금에 H사의 질권을 설정하는 조건이었다. 박씨는 집주인의 승락을 얻어 H사에 질권을 설정해줬다.
그런데 2013년 전세계약이 끝날 무렵 박씨는 집주인 등에게 보증금을 직접 돌려받았다. 검찰은 질권이 설정된 채권을 멋대로 변제받아 H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박씨를 배임죄로 기소했다.
1심과 2심은 박씨가 질권을 보호·관리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피해자에게 손해를 끼쳤다며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