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법이 없는 것은 태생부터 잘못된 것이다. 국세청이란 기관의 막중함과 특수성을 깊이 생각했었더라면 지난 1966년 3월 재무부 사세국에서 외청으로 분리할 때 국세청법을 제정했어야 했다.
우리나라는 전문성과 특수성이 강한 조직을 특별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검찰청법, 경찰청법, 국정원법, 감사원법, 한국은행법, 산업은행법, 한국전력공사법, 금융감독기관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금감원법), 교육공무원법, 소방공무원법 등 웬만한 전문직에 대한 조직법이 다 있는데 국세청법, 관세청법만 없다.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불법선거자금 모금 의혹인 '세풍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국세청법 제정이 추진됐지만 정치적 상황과 관련부처의 강한 반발에 막혀 번번이 무산됐다.
국세행정의 중요성
국세청은 연간 200조원 이상의 국가재정을 조달하는 곳이다.
세금 없이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 재정조달 없는 복지란 없다.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를 극복하고 통일재원을 마련하는 것 또한 재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재정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세행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세행정의 전문성
국세청은 깨알같이 쓰여진 5000쪽이 넘는 방대한 세법령규칙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세법을 집행하려면 국제회계기준(IFRS)에 의한 회계처리부터 알아야 한다. 또한 100人 100色의 복잡다양한 기업의 경제활동을 파악해야 한다. 기업의 재무담당자, 세무사, 회계사보다 국세공무원의 전문지식이 우월해야 하는 이유다.
국세공무원의 업무전문성을 무시하는 행태는 9급 세무직 선발시험만 봐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9급 세무직 시험에 세법, 회계학이 필수과목이 아니라 선택과목이라면 납득이 가는가? 세법, 회계학이 필수과목이 아닌데다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세무직 수험생이 회피하고 있다. 실제로 2015년 세무직합격자의 75%가 세법, 회계학을 보지 않았다. 이같은 문제를 인식한 인사혁신처가 2016년초 세무직 필수과목으로 전공과목을 도입한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공시생들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다.
세법, 회계학에 대한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국세공무원 채용에 따른 부작용과 피해는 납세자에게 전가된다. 검찰수사관이 피의자보다 법규를 모른다면 수사가 제대로 될리 만무하다. 기업재무담당자와 세무사, 회계사들이 국세공무원에게 세법과 회계학을 가르치면서 세무조사를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국세공무원은 전문성을 감안하여 국회직, 검찰, 경찰, 국정원, 금융직 등처럼 별도로 선발해야 한다.
국세청법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국세행정의 특수성
국세공무원은 세무조사는 물론 조세포탈범 고발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금품향응에 대한 유혹이 매우 높은 직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세공무원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직업도 드물다. 하지만 국세공무원은 행정서비스를 주로 하는 행정직공무원과 동일한 법률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무기로 치자면 핵무기에 대한 규제와 일반무기에 대한 규제를 같은 잣대로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세 신뢰성과 세수의 관계
국세청법 제정은 국세행정 신뢰성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세정신뢰성 제고는 세수에 플러스요인이다. 세율을 인상하지 않고도 세수를 늘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세정신뢰성 제고다.
세무행정에 대한 신뢰성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위협받고 있다.
첫째는 세무비리 문제다.
세무조사는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매우 엄격하고 공정하게 이뤄져야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다. 하지만 조사과정에서 유착과 비리가 발생하면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주기적으로 터지는 세무비리는 우리의 납세의식뿐만 아니라 법적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둘째, 세무조사대상 선정의 공정성과 객관성, 투명성 문제다.
세무조사가 권력자의 입맛에 맞춰 정치적으로 악용되면 세무행정에 대한 신뢰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정치적 목적의 세무조사만 문제가 아니다. 국세공무원이 자의적으로 세무조사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모 국세공무원이 지인의 부탁을 받고 지인의 경쟁자에게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세무조사를 벌여 법원이 세무조사 무효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조세법률주의 정신은 세무조사에도 엄격히 적용돼야 한다. 세무조사대상 선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국세청장 훈령이 아닌 국회에서 정한 법률로 담보해야 한다.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은 있지만 '세무조사법'은 없다.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세무조사법'은 없다.
세무조사가 외부감사보다 덜 엄격해도 되는 것인가?
외부감사는 외감법에 의해 매년 실시된다. 하지만 정기세무조사는 4년마다 하든 5년마다 하든 국세청장 마음대로다. 중소기업에 대한 세무조사 비율을 높이든 줄이든 이 역시 국세청장 마음대로다.
세무조사가 오남용되거나 악용되거나 형평성이 결여될 경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다. 임의적인 세무조사는 위헌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국세청장 훈령에 의해 운용될게 아니라 법률에 의해 규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세행정의 고도화, 과학화가 필요하다
미국과 캐나다는 글로벌 기업에 대해 우리나라처럼 4년마다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조사관을 파견하여 실시간으로 회계처리를 감독하는 '조사관상주파견제(CAP)'를 운용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은 워낙 덩치가 크고 회계처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국경수비대가 국경을 감시하는 것처럼 상시관리하지 않고서는 통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연매출 200조원, 종업원 10만명의 삼성전자처럼 덩치가 큰 기업에 대해 4년 주기로 30여명의 조사관을 서너달 파견하여 800조원(200조원×4년)에 달하는 거래내역을 조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미국과 캐나다 국세청의 판단인 것이다. 조사관상주파견제를 도입하려면 관련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세무사, 회계사 등의 직업이 미래에는 없어지거나 영역이 대폭 축소될 것으로 예상되는 급변기에 살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인공지능로봇으로 대체 가능한 일자리가 2년 후에 41.3%, 7년 후에는 70.6%에 이를 것이라 한다.
직업의 격변은 경제활동의 격변을 의미한다.
세제와 세정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세수는 갈수록 불투명해 질 것이다.
동사무소 공무원과 같은 잣대로 규제하는 것은 넌센스
검찰, 경찰, 국정원도 특별법에 의해 운용되고 있지만 정치적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에 이들 권력기관 공무원들을 동사무소 공무원과 같은 잣대로 규제를 했다면 어땠을까?
일반 행정직공무원과 같은 잣대로 규율되고 있는 국세청은 '세풍사건'을 비록해 전직 국세청장(직무대리 포함) 5명이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표적세무조사 시비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앞으로 정권의 향방이 어디로 가든지 국세청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켜 국민을 위한 국세청으로 바로 세우려면 먼저 법적시스템부터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