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의 관세포탈 의혹 등을 조사 중인 관세청은 지난 21일과 23일 조 회장 3남매의 자택 및 대한항공 본사 사무실, 전산센터 등 에 대한 전방위 압수수색을 실시하면서 이례적으로 현장에 기자들을 불러들여 빈축을 사고 있다.
관세포탈 혐의와 관련해 일반적인(관세조사) 경우와는 별개로 재벌 총수 일가를 직접 타게팅해 실시한 압수수색은 관세청 개청 이래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첫날 압수수색 현장엔 수 많은 취재진이 모여 열띤 취재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통상 비밀리에 진행되는 압수수색 과정이 고스란히 언론사 카메라에 담겨 전국민이 지켜보는 TV로 실시간 송출되는 이례적인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 관세청 관계자는 "그동안 관세청 압수수색은 사전 정보유출 위험 있어 철저한 보안 아래 이루어져 왔다"며 "관세청 직원이 직접 영상이나 사진을 촬영 후 브리핑 과정에서 관련 자료와 함께 언론에 배포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직접 기자들이 압수수색 과정을 취재한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국세청의 경우도 특정 기업에 대한 자료영치에 나설 경우 착수 당일 오전까지 내부 직원들에게까지 '행선지'를 알리지 않는 것이 보통. 미리 알릴 경우 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고 정보가 유출되면 대상 기업 등에서 증거 등을 파기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오세요, 오세요" 압수수색 과정, 언론 직접 불러 노출…왜?
한진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관세청 압수수색 과정이 언론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이유는 압수수색 당일 관세청이 직접 기자들에게 '취재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24일 관세청 관계자에 따르면 조 회장 일가에 대한 압수수색이 처음으로 벌어진 지난 21일 오전, 관세청은 압수수색에 착수하면서 현장에 서둘러 달려올 수 있는 인천 주재 기자들에게 취재협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인천세관 홍보팀 관계자는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인천세관 조사국으로부터 당일 (기자들을 모아 달라는)연락을 받았다"면서 "주말 오전이라 중앙지 기자들에게는 연락을 못했고, 인천 근처에 상주하고 있는 기자들에게만 급히 연락을 취했다"고 밝혔다.
즉 상부 지시에 따라 급박하게 언론들을 몰아, 압수수색 과정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켰다는 이야기다.
검찰의 경우 사안이 중차대한 경우나 사회적 관심이 집중될 경우 압수수색 정보를 은근슬쩍 흘려, 언론에 일부러 노출되도록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왔다.
그 때마다 수사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 조성 등 정치적 계산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곤 했는데, 이에 일각에선 이번 관세청의 압수수색 역시 이런 측면에서 검찰의 방식을 흉내낸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물컵 갑질' 등으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한진 그룹 총수일가에 대한 비판 여론이 팽배하다는 것을 감안해 관세청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김영문 관세청장.
일각에서는 관세청이 이번 압수수색 과정에서 검찰과 유사한 행태를 보인 이유를 가까운 곳에서 찾고 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김영문 관세청장이 다름 아닌 검찰 출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 관세청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고 12년 후배인 데다, 참여정부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문 대통령 밑에서 사정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한 경험까지 있기 때문에 '실세청장'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관세청의 압수수색 보도가 난 후 김 관세청장과 문 대통령의 특별한 인연을 다루는 내용의 기사가 곳곳에서 쏟아지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관세청에 몸담기 전까지 관세행정 경험이 전무, 취임 후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김 관세청장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줄 기회를 잡았다는 평이 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선 여론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압수수색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
지금껏 뭐하다... 관세청의 '뒷북' 조사 제대로 될까
하지만 관세청의 과감한 행보는 온전히 평가받고 있지 못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한진 일가 조사에 대해 관세청도 '아킬레스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쏟아지게 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동안 뭐하다 이제와 뒤늦은 조치를 취하는 지'에 대한 비난여론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김 관세청장은 지난해 7월 취임사에서 "20년간 검사로서 법과 원칙을 중심으로 이를 적용하고 또 지키도록 강제하며 살아왔다"면서 "관세와 관련한 법과 원칙이 무엇인지 근본에서 살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본인이 검사 출신임을 수차례 강조하며 밀수와 관련한 부분에 대해선 자신감을 내비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한진그룹 일가의 관세 포탈 혐의가 밝혀진다면 그동안 관세행정 시스템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점을 자인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여기에 더해 관세청 직원들이 한진 일가의 무관세 통관을 방조해 왔다는 증언까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높아지고 있다.
자체적인 관세청의 내부 감찰이 이루어진다해도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는 가운데, 한진 일가의 관세 포탈과 관세청을 둘러싼 의혹은 하루 빨리 검찰에 넘겨 조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증폭되고 있다.
관세청 관계자는 "(한진과의 유착관계 등에 대한)내부 감찰은 별도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며 "조사과정에서 함께 잘못된 직원이 발견되면 엄정히 처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관세청의 조사 방법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관세청은 이번 압수수색을 바탕으로 최근 5년 동안 한진 일가의 해외 신용카드 구매 내역과 압수해 온 집안 물품을 교차분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신용카드로 구매한 물품이 집안에 있는지, 그 물품에 대한 관세를 한진 일가가 제대로 냈는지 대조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일반 해외여행자에 대해서도 전수조사가 불가능해 엑스레이 통관 시 이상이 없는 경우 5% 남짓 밖에 조사를 못하는 시스템인데, 다른 경로로 물품을 들여온 경우에 대해 제대로 혐의점을 잡아낼 수 있겠냐는 의문이 관세청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