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불안한 초상화. 역사가 길다. 인간을 돈이나 기계의 부속품 쯤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나 이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사회주의 모두 참된 구원, 안식에는 관심이 없다. 개인은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언제나 불가항력적이다.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젊은이들은 잡히지 않는 미래와 불안을 덮은 채 잠들고 거리로 내몰린 어버이들은 밤이슬을 맞으며 불 꺼진 공동체로 돌아올 뿐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인간적 가치가 사멸해가는 시대는 언제 종언을 고할 것인가.
진지한 성찰로 새로운 삶의 지평을 모색해온 시인 이재훈이 새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에 이은 네 번째 작품집이다. 수록된 62편의 시에는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 데 배어 있다. 삶이 환희로 가득찬 시간이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한 시간이라는 자각, 그리고 그 고통과 괴로움은 결코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포기하려 찾아오는 고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삶을 열어젖히는 과정에서 마주해야만 하는 생의 빛일 수 있다는 힘겨운 선언이다.
199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한 시인은 "세상의 추위를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의 온기로 견디겠다는 엄결한 자세"(장은수)를 견지하고 "현실에서 도주하는 꿈의 언어들이 아닌 현실을 견디기 위한 꿈의 언어"(정재학)를 구사한다는 평을 듣는 바 이번 시집에서도 슬픔을 물질처럼 붙잡고 그것을 오래 들여다본다.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환상적 언어로 고통을 끌어안는 방법을 택했던 그가 들여다보는 슬픔은 순도가 높다.
그 슬픔은 일상적 언어를 통해 지극히 육체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자신의 일부가 된다. 오직 생존만이 도덕인 바다의 꿈틀거림/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계절이 계속되고/ 가장 알량한 회개가 마음을 헤집는다/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는/ 눈물벼락/ 남몰래 땅속을 흐르는 물주머니가/ 천둥처럼 얼굴에 달라붙는다.('생물학적인 눈물' 부분) 스스로 '그저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이라며 '뭐라고 울까요' 묻는 시인에게서 '눈물이라는 형태의 존재의 춤'을 통해 육체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걷기의 시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당신을 떠나는 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르는 때.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온 날.
온몸이 뜨거워지다가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창밖엔 횃불이 지나간다.
죽어야 산다.
사라져야 기억한다.
좌절의 통로로 세포가 잠긴다.
낸 몸엔 벌써 병이 찾아왔다.
바람은 나무를 돌보고
나무는 새를 돌본다.
몸에서 풍기는 불확실한 냄새.
혼자 밥을 먹는다.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히는 신비의 소리.
오래 생각하면 평안이 온다.
나무보다 성스러운 존재는 없겠지.
두려움이 전쟁을 만든다.
광야에 버려진 염소를 기억한다.
사랑을 지닌 정념의 몸.
언어를 가진 천형의 몸.
당신의 발자국이 머릿속에 가득하다('결핍의 왕')
이른 비가 하늘을 덮는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물의 더미에 몸을 맡긴다.
세상 풍조가 살결에 새겨진다.
(……)
만져야 하고 맡아야 하는 바람이
물속까지 숨을 불어넣는다.
유신론의 시대가 오고 있다.('넙치' 부분)
안개는 다시 태어난다는 약속도 없이 천천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안개를 온몸으로 먹고 슬픔은 기지개를 편다.('누대' 부분)
무릎을 꿇고 뱃속에 가득한 허기를 노래했습니다. 제게도 노래가 있습니다. 흙이 알고 물이 알고 미천한 생물이 아는 소리가 있습니다.('노란 애벌레가 좋아'에서)
그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세속 도시의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지하철의 문은 계속해서 열리지만,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인도할 출구는 없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고. "해거름에 골목을 산책하다가/ 허름한 편의점 테이블에 앉았다/ 누추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을 가만히 보았다/ 해는 슬쩍 잠기고/ 그 순간 가장 평화로운 바람이 목뒤를 스쳤다/ 그 바람을 찾아 오래 떠돌고 싶다."는 소감이 무구하고 정겹다. 난해하지 않으면서 웅숭깊은 작품을 접한 기쁨이 크다.
우찬제 평론가는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애련에 젖게 한다. 시인 이재훈에게 그 정조는 무척 각별하다. 지금은 사라진 고대 문명이나 사라져 가는 시원적 자연에 감응하는 그의 상상의 촉수는 매우 예민하다. 문명의 늪을 거슬러 태초의 궁륭으로 다가서는 소리의 환(幻)이 웅숭깊다. 때로는 혼돈으로 들끓고, 때로는 명상으로 침묵하는 그 소리의 환은 격렬한 듯 단정하고, 단정한 듯 격렬하다. 그 소리의 환의 스펙트럼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거역하거나 크게 순응하는 연금술사의 꿈의 폭과 깊이를 가늠케 한다. 사라져 감 혹은 부재라는 그리움의 양식을 통해 이재훈은 존재의 시원적 리듬을 새삼 환기한다. 그리고 헝클어진 동시대의 존재의 리듬에 반성적 감촉을 제안한다. 큰 슬픔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친 우리네 존재의 신명은 아득한 듯 가깝고, 오래인 듯 여기이고, 사라져 가는 듯 되돌아온다"는 헌사를 바쳤다.
문학동네시인선 166. 1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