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년(忘憂年)

힘이 좀 듭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어렵고 힘이 들 때는 어떻게 하나요? 나무는 속으로 나이를 먹고, 무화과는 속으로 꽃을 피우고, 사람은 속으로 삼킨 눈물로 성장하는 것일까요?

2015년 아니면 2014년 이른 봄이었을 겁니다. 한밤 TV에서 정호승 시인을 만났습니다. 「풍경 달다」라는 시의 울림은 예상치 못한 여운을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네비의 안내를 받아 화순 운주사로 달려갔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죠. 일주문을 지나니 다양한 형태의 탑과 불상 등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되도록 와불님을 천천히 뵙고 싶어 게으른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낮은 언덕을 오르내리고 작은 개울도 지났지 싶습니다. 마침내 마주하니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한 번은 시계방향으로, 또 한 번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번갈아 가며 몇 바퀴를 돕니다. 오래 보기 위해 눈을 감았습니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시인의 시중 시인이 암송하고 있는 유일한 시라고 합니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다니다가 풍경(風磬)이 눈에 들어오면 하나둘 샀습니다. 아파트 문에도 걸어두었습니다. 간혹 선물도 합니다. 집에 보관 중인 풍경도 여럿입니다. 서랍 모퉁이에서 숨죽이고 있는 풍경을 닮아갈까 두렵기도 합니다.

시인은 ‘누구나 인생이 산산조각 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조금 기다리면 된다’며 웃습니다. 자신의 시중 가장 큰 힘과 위안을 얻는 시로 「산산조각」을 꼽습니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라는 시구를 가슴속에 품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선화에게」를 통해서는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은 하느님도 눈물을 흘리신다”며 위로해 줍니다. 때론 시가 생명수 같습니다. ‘시인은 신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힘이 들 때는 어떻게 하세요?
2006년 12월 29일(금)은 새로운 직장에서 맞이하는 첫 종무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집에서 차를 몰고 나오는데 문득, 시간이 멈춘 듯 지난 6개월여의 일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핸들은 강남이 아닌 춘천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춘천세무서장님은 마지막까지 저의 퇴사를 만류했던 분(나중에 광주지방국세청장으로 명예롭게 퇴임)이었습니다. 친구같이 편안하고 때론 형님처럼 따뜻한 분이셨죠. 서장실로 올라가니 갑작스러운 방문에 깜짝 놀라 했습니다. 연말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른 아침 시간에 불쑥 찾아왔으니. “무슨 일이냐? 무슨 일 있느냐?”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리저리 거듭 달리 물었습니다.

로펌생활이 공직과는 다르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 어려움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입사 6개월여 만에 퇴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조금 이른 점심에 몇 순배의 술이 돌았습니다. “서장님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라는 말에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본 사람처럼 “힘들지? 넌 잘할 거야”라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죠. 그 이후 6년 넘게 로펌에서 소중한 경험을 쌓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세요?
2012년부터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고민이 적지는 않습니다. 힘들 때도 늘 사람들이 옆에 있습니다. 물론 기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빚을 지게 되고, 화가 나거나 안타까운 사람으로부터는 고통의 짐을 지게 됩니다. 마음의 고통은 박완서 작가님처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저 견뎌 내야 할 몫인가 봅니다.

지난 12월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들려줍니다. “힘이 들 때면 저는 부모님을 찾아뵙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강남 사무실이 아닌 남도의 끝자락까지 내달려 부모님 산소를 찾았습니다.

한걸음에 달려온 마음이 무색하게 당도해보니 부모님 산소가 산짐승들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별다른 준비 없이 내려간 상황이라 맨손으로 주변 흙을 파고 끌어다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다 메우지 못한 봉분은 가슴에 멍으로 채우게 됩니다.

준비해간 술과 음식류를 올렸습니다. 부모님 곁에 앉습니다. 파란 하늘빛이 유난히 곱습니다. 주변 소나무는 변함없이 푸르릅니다. 파란 하늘 끝에서 겨울바람을 타고 온 엄마의 내음에 젖어 듭니다. 당신도 보고 싶었나 봅니다. 저의 어깨를 산바람 손길로 쓰다듬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라’ 그리 하십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해가 바뀐다고 어렵고 힘든 일이 사라질 리야 없겠지요. 마음에 생긴 물집이 굳은살이 되기까지 또 얼마나 몸살을 앓을지 모릅니다. 새해에는 몇 편의 시와 몇 잔의 술, 부모님의 품을 망우대(忘憂臺)로 삼아 심기일전(心機一轉) 다짐합니다.

◆ 글쓴이 : 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약력] 서울청 국선세무대리인, 중부청 국세심사위원,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법무법인 율촌(조세그룹 팀장), 행정자치부 지방세정책포럼위원 / 가천대학교 경영학 박사 / 국립세무대학 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