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국가의 국민들은 법에서 정한대로 세금을 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세금으로 조성된 재원(예산)을 정해진 원칙에 따라 투명하게 그리고 낭비 없이 집행해야할 의무가 있다.
다시 말해 세금을 국민들로부터 반강제(?)로 거둬들였다고 해도 국가는 단 한 푼도 헛투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고이 납부한 세금이 대한민국에서는 어떻게 쓰여지고 있을까. 함부로 쓰지 말고 아껴서 국가발전을 위해(나아가 국민생활의 발전을 위해)쓰라고 내놓은 세금은 대한민국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국민 세금을 정부가 어떻게 쓰고 있는지 감시할 의무가 있는 정치권은 어떤가.
최근 중앙선관위가 지난 2005년 1월1일부터 2006년 6월20일까지 각 정당과 국회의원의 정치자금 수입·지출 내역, 지난 5·31지방선거 비용 실사를 해 본 결과 납세자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한 국회의원은 국민의 세금에서 지원된 정치자금 (개인용도로)밥 먹고 차에 기름 넣는데 써 버렸다. 개인의 안경이나 옷, 화장품 구입에 써버린 국회의원도 있었으며 이것도 모자라 아예 가요주점 유흥비로 가져다 '바친' 경우도 있었다.
정치 잘하라고 세금을 지원해 줬더니 이를 마치 자신의 '쌈짓돈'인양 써버린 것이다. "몰랐다", "미리 물어보고 썼다"는 둥 변명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 같은 치졸한 변명이 세금을 낸 국민들에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부로 눈을 돌려보자. 정부의 '예산(세금)낭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아예 '고전(古典)'이 됐다. 허구헛날 예상낭비를 없애겠다고 외쳐대지만 도통 없어질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귀찮을 정도다. 세금징수 기관인 국세청의 일례만 들어보자. 최근 기획예산처가 발표한 예산낭비 신고사례 중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례가 지적돼 눈길을 끌었다.
국세청이 10원의 세금을 덜 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친절하게도(?)' 독촉장을 써서 등기우편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10원의 세금을 더 받기 위해 몇 천원 하는 등기우편 비용을 사용했다니,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해줄 수 없는 일이다.
정작 세금을 낸 국민들은 이러한 실태를 접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인터넷 토론을 통해 정부와 정치인, 부패한 일부 공직자들을 성토하는 것 뿐. 고의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거나(물론 고의로 세금을 내지 않는 이들도 있다) 폭동을 일으킬 여유도 힘도 없다.
국가에서 세금을 어떻게 사용하던 딱히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 '민초(民草)'들의 현실인 것이다. 그저 내가 낸 세금이 알뜰하게 사용되고 또 그만큼의 국가적 혜택이 두터워지는 것을 바라는 일이 최선인 것이다.
정부는 27일 내년도 내국세 세입예산을 발표하면서 내년 내국세 수입 규모가 총 148조1000억여원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도 정부지출(예산안) 방안도 함께 발표했다. 적재적소, 필요한 부분에 '요긴하게' 쓰겠다는 계획까지 담아서. 그러나 정부 발표 어디에도 '한 푼의 세금도 낭비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식의 의지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일부에 불과할 지라도)내가 낸 세금이 엉뚱한 곳에 사용되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잇속을 채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세금 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신성한' 납세의 의무는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거추장스런 개념에 불과해진다.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은 형이상학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현실이 이렇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