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판사 절반 넘고,여성전투편대장도
미국선 하원 의장 이어 대통령도 넘봐
#1. 지난 2월 2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강당. 이날 신임 판사와 예비 판사 임명장 수여식에는 여성비율이 전에 없이 높아 눈길을 끌었다.
임명장을 받은 판사는 모두 187명. 이중 여성이 절반이 넘는 104명으로 '여풍' 시대 도래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로써 사법부 내 여성의 비율(19.1%)은 전체 판사의 20%에 육박했다. 1980년대만 해도 사법고시 합격 여성의 비율이 3%대에 머물렀음을 상기한다면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2. 그로부터 열흘 전인 11일 미국 최고 명문 사학인 하버드대학은 371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 총장시대를 열었다. 하버드대는 이날 역사학자인 드루 길핀 파우스트 교수를 제28대 총장으로 선출했다.
파우스트 총장은 선출 후 "여성이 하버드대 총장이 되는 것은 몇 십 년 전만 해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대인 아이비리그 대학 8개 중 여성 총장이 나온 곳은 프린스턴대, 브라운대, 펜실베이니아대 등 4개로 늘어났다.
국내외에서 여성 파워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 남녀차별 의식이 희박해진 반면 남녀평등 의식은 갈수록 고양되고 있다. 남녀가 동등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성별로 직업을 구분해오던 경계선도 더욱 모호해지는 추세다.
여풍(女風)'은 남녀 관계를 양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변화시켰다. 예전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직종과 직위에 진출하는가 하면 일부 분야에서는 '여초(女超)' 현상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미국, 한국, 프랑스 등에서는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지 모른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여성의 한계처럼 받아들여지던 이른바 '유리 천장'이 사회 곳곳에서 균열을 넘어 파열 조짐을 보인다. 이는 정치, 법조, 외교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여성 약세가 심했던 기업분야에서도 유사 현상이 미흡하나마 조금씩 일고 있다. 공부,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학생을 능가하는 여학생을 일컫는 '알파걸'이 미국 등 선진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출현해 여성 파워는 갈수록 강해질 전망이다.
●'유리천장'과 '알파걸'
여성이 사회의 중상위층에 오르기 힘든 것은 국내외를 막론한다. 이런 여성의 한계를 나타낼 때 단골로 쓰이는 용어가 바로 '유리 천장(glass ceiling)'. 여성들의 고위 또는 중간 관리직 진출에 방해가 되는 무형의 장벽을 가리킨다. 기업 등에서 초기의 기회가 비교적 동등하게 주어져 많이 개선돼가고 있으나 일정선 이상으로 오르는 데는 보이지 않는 제한, 즉 '유리 천장'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유리 천장은 그 한계를 설명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여성이 중상위층으로 승진할 수 없게 저지할 뿐 아니라 작업현장이나 사무실에서 하급직원으로 근무하는 여성들이 업무와 관련된 훈련이나 출세, 승진 등에서 공평한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이는 제도와 의식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일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알 지니 미국 료욜라대 교수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해당하는 성적 편견이 작용해 높은 직급으로 진출하기 힘들다"며 "일터의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주로 남성인 데다 철저히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기업 구조 에서 기득권층인 남성들은 여성과 권력 기반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알파걸'이라는 용어로 새로운 여자의 탄생을 알리고 있기도 하다. 댄 킨들런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알파걸'에서 "근래들어 공부,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학생들을 능가하는 엘리트 소녀들이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출현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여자들은 사춘기가 되면 자신감을 잃고 열등감에 휩싸이게 된다는 게 그동안 심리학계의 유력학설이었으나 이들 '알파걸'은 여자라는 이유로 제약감을 갖기는커녕 남학생들보다 더 씩씩하게 생활해간다. 알파걸의 등장은 곧바로 '알파우먼'의 증가로 나타나 전반적으로 여성파워의 향상을 이끈다는 것이다.
●국내 추이
남존여비(男尊女卑)가 말해주듯이 한국 전통사회는 남녀차별을 당연시했다. 남녀가 사용하는 공간의 차별화는 물론 의식의 차별화, 직업의 차별화가 분명했다. 이런 추세는 최근까지 이어져 갖가지 형태로 남아 있으나 그 틀이 점차 깨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달 22일 공군사상 최초로 여성 전투기 편대장이 탄생해 금녀의 벽을 하나 더 무너뜨렸다. 공군 제8전투비행단 소속의 박지연 대위가 그 주인공. 2002년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됐던 박 대위는 총비행시간 652시간을 기록하며 '여성 전투기 편대장 제1호'가 됐다.
여성이 국군 핵심전력으로 인정받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근래들어 이런 인식은 차츰 바뀌고 있다. 육군의 경우 2001년에 국군 창설 53년 만에 최초로 여성장군을 배출해 화제가 됐다. 퇴역한 양승숙 준장에 이어 이재순 준장이 그 뒤를 물려 받았고, 지금은 윤종필 준장이 당당하게 별을 달고 있다.
지난해 한명숙 총리가 정부수립 후 첫 여성총리직에 올라 정치분야에서 여성 진출이 좀더 활발해질 수 있는 이정표를 세웠다. 한 총리의 탄생은 가부장 문화의 장벽을 뚫고 여성의 정치적 역할 증대라는 사회 흐름을 상징적으로 말해줬다. 한 총리는 곧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하는데, 일부에선 올해 대선의 후보로 점치기도 한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사법부다. 지난 1월 16일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연수생 중 판사 임용이 예정된 여성이 전체 90명 중 66.4%인 58명을 차지했고, 검사 임용이 예정된 연수생도 전체 100명 중 44명이나 됐다. 내정상태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전효숙 헌법재판소 후보자의 기용도 시대변화를 읽을 수 있게 했다. 참여정부 초기의 강금실 법무장관 임명 또한 전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지난해 현재 80%를 넘어선 가운데 고소득 전문직종에서 새로 생긴 안정적 일자리 10개 중 6개는 여성이 차지해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지난 1월 22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늘어난 취업자 29만5천 명 중 여성이 18만1천 명(61%)을 차지했다.
여성취업의 질적 향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의사, 변호사, 회계사, 약사, 대학교수 등 전문직에서 절반 이상이 여성의 몫이었고, 국회와 지방의회 의원, 고위 임직원 등 전문.기술.행정관리자는 신규 취업자 22만2천 명 중 69.5%인 15만4천 명이 여성이었다. 1996년까지만 해도 10%를 밑돌던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의 지난해 비율은 52.6%로 절반을 넘어섰고, 행정고시(44.0%), 사법고시(32.4%)도 과거보다 크게 높아지며 '우먼 파워'의 맹위를 확인시켜줬다.
●국외 추이
아버지는 일하러 나가고 어머니는 집에서 자녀를 돌보며 살림하는 전통적 가족 형태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외가 마찬가지였다. 선진국에서도 여성들은 '아무개씨'보다는 '아무개씨 부인' 또는 '아무개네 엄마' 정도로 불리며 남성에 종속됐던 것이다. 미국의 경영학자 주디 로즈너 씨는 "성적 거부감은 여성에게 판에 박힌 역할을 강요하고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고 분석한다.
이와 같이 직장 내에서 직급이나 직종에 관계없이 여성이 맞닥뜨리게 되는 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편견은 차츰 깨지고 있다. 미국의 여성 노동인력 비율이 절반에 가까워 양적 균형을 맞춰가는 가운데 분야별로 편차가 크긴 하나 질적 도약도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도약은 청교도적 보수 분위기인 미국에서 최근 눈부시게 시도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선구로 여겨지는 미국이지만 여성의 고위직 진출은 생각보다 적었던 게 사실. 그러나 행정부, 의회, 재계, 문화계 등에서 여성들의 활약상은 두드러진다.
지난해 말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하원의장이 된 낸시 펠로시는 이런 변화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펠로시 의장은 여성이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 힘든 풍토에서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으로 취임했다.
민주당의 대선주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도 미국의 정치지형을 뒤엎을지 모를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은 흑인여성으로서 권력서열 4위에 올라 기염을 토한다. 오는 4월 대선을 겨냥해 뛰고 있는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도 최초의 프랑스 여성 대통령이 될지 주목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학 사령탑을 여성들이 하나씩 차지한 것도 유리 천장의 파열현상을 나타내주는 사례다.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에 앞서 셜리 틸만 프린스턴대 총장, 루스 시먼스 브라운대 총장, 에이미 거트맨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이 지난 6년 사이에 총장직에 올랐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년 전만 해도 미국대학의 여성총장 비율이 10%에 그쳤으나 지난해에는 23%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