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한 대(大)재산가가 사망한 것은 지난 2007년. 사망한 재산가의 유산은 아내와 9명의 자녀가 고스란히 상속을 받았습니다.
부동산과 예금 등을 합친 상속재산 액수는 무려 173억원. 상속인들은 현행 법상 허용된 공제제도를 활용, 33억원 가량을 공제한 140억원을 과세표준으로 삼아 상속세 59억원을 관할 세무서에 신고, 자진납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재산가가 아들(이하 A씨)의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차명계좌에 입금되어 있던 57억원이 재산가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인출, 어딘가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국세청의 상속세 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이죠.
이 돈의 사용처는 의외로 금새 밝혀졌습니다. 아들인 A씨가 회사를 설립하는데 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국세청은 이를 '사전증여'로 판단해 A씨에게 증여세 31억원을 내라고 통지했습니다.
표면적으로 국세청의 과세처분은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31억원의 세금을 두들겨 맞은 A씨는 가만있지 않고 조세심판원에 과세불복을 냅니다. 과연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 "아버지의 '증여의사'가 없었다(?)"= 조세심판원에 과세불복을 제기한 A씨는 "증여자(아버지)의 '증여의사'가 없었다"는 논리로 차명계좌에서 인출된 57억원에 대한 증여세 부과처분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A씨의 이름으로 된 아버지의 차명계좌에 입금되어 있던 돈은 2006년 8월31일부터 시작, 2006년 12월22일(11억원)과 2006년 12월27일(30억원)에 걸쳐 전액 인출됐습니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2007년 2월23일 아버지가 사망했습니다.
A씨는 "차명예금이라 해도 명의는 본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본인의지에 따라 입출금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증여자의 증여의사가 없었다")을 뒷받침할 증거자료도 제출했습니다. 바로 돈이 인출되는 시점을 전후한, 아버지에 대한 병원의사의 '소견서'였습니다.
2006년 11월22일 작성된 소견서에는 "환자(아버지)는 현재 만성신부전, 당뇨, 폐렴, 패혈증으로 기관삽관, 인공호흡기, 투석 등의 치료 중이며 정신상태는 멍한 모습으로 눈에 초점이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종합하면 통장의 돈을 인출해 가는 시점에는 아버지가 사실상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자신(A씨)에게 해당 금액을 '증여'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여가 아니며 당연히 세금부과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A씨의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세청은 "사망한 아버지는 2006년 9월12일까지 00운수회사의 대표이사로 재직한 사실이 법인등기부등본에 의해 확인되고 있고, 또 최초로 돈이 인출됐던 2006년 8월31일에는 의사표현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세청은 "이후 증여분(2006년 12월22일, 12월27일 인출분)에 대해서는 피상속인의 정신상태 등으로 보아 증여의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A씨가 돈을 인출해 회사설립 자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는 현금증여에 해당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심판원, "증여의사 없었다고?…사회통념상 맞지 않다"= 심판원이 국세청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됐습니다. 심판원은 A씨의 주장은 구체적인 증빙도 없는데다가 사회적인 통념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심판원은 결정문을 통해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간의 증여행위는 특수 여건에서 수시로 행해지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라며 "단순히 증여의사가 없었다는 막연한 주장만 가지고 이를 증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심판원은 이어 "차명계좌에 입금된 금액이 최초 출금되던 시점(2006년 8월31일)에는 피상속인(아버지)이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던 시점으로 보여진다"라며 "A씨가 돈을 인출해 회사설립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국세청이 이를 증여로 판단, 세금을 부과한 처분은 잘못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