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후보의 경제민주화 실천공약이 우여곡절 끝에 공식발표 됐다.
'기다려온 변화, 박근혜가 바꿉니다'라는 구호가 무색하게도 '박근혜의 경제민주화정책(수정안)'은 한마디로 '변화'도, '바꾸네'와도 거리가 먼, '도로 박근혜'였다.
지난 4․11총선 때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톡톡히 재미를 봤다. '경제민주화 전도사' 김종인씨를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하고 경제민주화를 정강정책의 맨 앞에 내세우며 국민들에게 새누리당의 '변화'를 각인시켰다.
시대정신으로 강조되는 경제민주화를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야권보다 먼저 내세우며 이슈를 선점했고, 대선캠프에서 김종인 위원이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정책최고책임자가 되면서 제 궤도에 오르는 듯 했다.
김 위원장이 내세운 경제민주화의 요체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완화'다. 그러나 발표된 경제민주화 실천공약에서 기존 순환출자 지분의 의결권 제한과 대기업집단법 제정, 계열사 지분조정명령제, 경제사범에 대한 국민참여재판 의무화, 재벌총수·임원 연봉공개 등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김 위원장의 핵심정책은 모두 빠졌다.
발표문에서 '재벌'이란 표현조차 찾아볼 수 없고, 발표현장에 경제민주화 공약을 총괄했던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발표된 '35개 실천과제'의 대부분은 행위규율수단에 집중돼있다. 재벌의 기득권은 보장해주되, 앞으로 불법행위와 불공정거래행위 등 반칙을 저지르면 엄정히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경제민주화가 아닌 '공정거래 질서 확립'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재벌총수의 사면권제한과 업무상횡령 등에 집행유예금지 등 법집행 강화약속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고, 보수정당으로서 이 정도의 변화도 쉬운 일이 아님은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력 집중을 완화시키고 시장구조와 민주질서 왜곡을 바로잡으려면 재벌의 구조개혁은 필수적이다. 기존 순환출자의 경우 당장 고리를 끊도록 강제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일정 유예기간을 두어 그룹전체의 출자구조와 조직형태를 보다 합리적인 모습으로 재편토록 유도는 했어야했다.
"경제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제세력을 국민감시 하에 두는 것이다. 행동의 결과를 다스리는 규정 만드는 것만으로는 효력이 좋지 않고 그 자체를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해야한다"는 김종인 위원장의 볼멘소리가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김 위원장은 기존 순환출자에 의한 의결권 제한, 산업자본의 금융회사소유규제, 중소기업사업영역 침해방지를 위한 계열사의 편입심사제, 재벌총수의 사익(私益) 추구 시 지분조정명령 등을 하나의 법체계로 묶은 '대규모기업집단법' 제정을 제안했지만 대부분 폐기됐다.
박 후보는 이들 핵심내용이 제외된 이유를 나름대로 소상히 언급했지만 설득력은 약했다. '대규모기업집단법'제정은 "세계적으로 선례가 거의 없고, 현행 법체계와 충돌해 중장기과제로 검토키로 했다"고 설명했으나 재벌문제 자체가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란 점에서 '세계적 선례' 운운은 구실일 뿐 재계의 입장과 항의를 수용한 데 불과하다.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을 제한하면 우리 기업이 외국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노출될 수 있고, 경영권 방어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쓰도록 하는 것이 국민경제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는 재벌기업들이 누누이 내세워온 방어논리 그대로다. 재벌들의 순환출자가 불법임이 이미 명백히 드러난 상황이고, 총수 지배권 지키는 일과 대기업들의 투자 및 신규 일자리 창출은 별개의 사안이다. 투자는 수익성전망과 투자논리에 따른다. 외국의 공격적 자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국내 재벌기업들이 허술한가. 이 역시 재벌보호 논리다.
'중요경제범죄에 대한 국민참여재판도입'의 폐기에 대해 박 후보는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 침해 논란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경제사범은 이미 범법자인데 평등권 침해 운운은 설득력이 없고, 특히 '경제세력의 탐욕이 정치권과 결탁해 죄를 짓고도 제대로 처벌 받지 않아 배심원제를 도입하게 된 배경'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가 국민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경제가 아닌, 재벌에 부담을 주지 않고 공정거래에만 초점을 맞춘 '재벌감싸기'에 머물렀다. "양극화와 경제침체 유발 원인에 대한 근본 해법이 없는 현상유지정책에 불과하다"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지적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며 국민통합, 정치쇄신과 함께 3대 국정운영지표로 내걸었다. 재벌에 의존하는 성장이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지속적인 성장을 어렵게 해 재벌개혁을 통해 성장의 과실이 고루 퍼지는 새 경제패러다임을 만들자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시대정신이다.
재벌구조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도 없이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실현시키겠다는 것인가. 기존 제도의 틀 내에서 양극화 해소는 수없이 시도됐던 실패한 방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새누리당이 당의 정강·정책과 이름까지 바꾸며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왔을 때 적잖은 국민들은 반신반의했었다. 경제민주화가 '정체불명의 포퓰리즘'이라는 독설까지 당내에서 불거져 나왔고, 박후보 역시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치 세운다)와 지금의 경제민주화는 철학이 같다"고 언급해 경제민주화의 실체와 그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박 후보의 '유턴'은 야권 단일화에 맞서 보수층을 결집시키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얘기된다. 하지만 재벌을 옥죄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진다는 식의 재계논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존 순환출자 규제에 따른 기업의 혼란을 말하기 전에 재벌기업들이 스스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양극화를 해소하며 불공정행위 근절에 나서는 것이 도리다.
재벌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 경제정책으로 인한 경제력집중 문제를 제쳐두고 '복지과잉'이나 '포퓰리즘정책'에 화살을 돌리는 것은 본말의 전도다. 경제민주화가 성장에 발목을 잡는다는 주장은 반대론자들의 방어논리다. 경제민주화와 성장은 함께 가야하고, 경제민주화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한 새 성장모델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국가적 과제다.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에 부정적인 보수층 '집토끼'에 대한 결속력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경제민주화 후퇴가 주는 상징성은 '도로 박근혜'라는 부메랑이 되어 당장 국민 절반이상의 마음을 얻는데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
경제민주화는 누가 집권하던, 싫던 좋던, 저성장기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우리경제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기 때문이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