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오는 26일 임기 반환점을 맞는다. 지난 2년 반을 돌아보고 남은 2년 반의 국정운영에 고삐를 바짝 죄어야 할 때다.
지난 6일 박대통령의 대국민담화는 1년 2개월 만인데다 임기 반환점을 앞둔 시점이어서 각별한 기대를 모았다. 임기 전반이 성공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지난 시간 미흡한 부분을 반성하고, 이를 거울삼아 후반기 국정운영의 각오를 다지고 비전을 국민과 공유하는 자리였어야 했다.
하지만 담화는 형식과 내용 모두 이런 기대를 저버렸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대국민담화를 선택했다지만 기자회견이 아니어서 일방적 메시지 전달에 그쳤다. 담화의 제목을 ‘경제 재도약을 위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으로 내용을 한정해 지난날의 반성과 앞으로의 변화 여지를 아예 차단시켰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국민 여러분의 협조와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라며 25분동안 프롬프터로 줄줄 읽어 내려갔다. 국민을 향해 “간곡히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말을 다섯 번에 걸쳐 반복했다. “국민 여러분의 동의”, “함께 손잡고 동참”, “하나 된 노력”,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같은 표현들도 썼다.
담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경제 재도약의) 노력은 정부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해낼 수 없다”며 “혁신과 개혁의 동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므로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하며 힘찬 행진을 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도 했다. 취임 이후 세 차례 내놓은 대국민 담화와는 어조가 사뭇 달랐다.
호소는 절절했지만 국민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진정성을 갖고 국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방적 훈시’라는 야당의 비판은 의례 그러려니 하더라도 “읽고 끝난 대통령담화, 국민 협조하고 싶겠나”(동아일보), “절체절명의 4대개혁, 국민공감부터 얻어라”(국민일보), “4대개혁, 정권 잃을 각오없으면 국민설득 못한다” (조선일보), “대국민담화, 목표만 있고 변화는 안보인다”(한국일보) 등등 도하 주요 신문의 사설들이 일제히 날을 세운 것은 예사롭지 않다.
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담화에 공감한다는 응답은 고작 47%(리얼미터, 8월6일)였다. 나머지 53%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소통방식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지난 2년 반 동안 담화 4차례, 기자회견 2차례뿐이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온 나라가 홍역을 치르고 그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대통령은 이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정부의 초기방역 실패를 이유로 보건복지부 장관을 경질했다면 대통령도 당연히 사과의 뜻을 밝히고 재발 방지약속 등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보듬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다. 국정원 해킹 논란은 정쟁으로 치부한다 해도 메르스 사태 같은 명백한 과오조차 비켜가면서 국민들에게 진정성을 알아주고 협조해달라고 어떻게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청와대 측은 담화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출입기자들에게 일부 질의응답 기회를 주는 방안을
한 때 검토했다가 취소했다고 한다. 국민들이 갖고 있는 궁금증에 대해 박 대통령이 질문을 받고 성심 성의껏 설명을 했다면 의미 있는 소통의 장(場)이 될 수도 있었다.
대통령 참모들의 수준도 예나 지금이나 실망스럽다. 대통령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변하라고 한다면 누가 공감하겠는가.
4대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체질을 개선시키고 신성장 동력을 마련해 경제를 재도약시키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구조개혁 추진과정에서 이익집단들의 반발과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조정할 것인지,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어떻게 처리할 지 등 실질적 문제에 대해 답을 내놓지 않았다.
4대 구조개혁과 서비스산업 육성,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등 경제재도약의 ‘답’은 이미 나와 있는 만큼 여야 정치권과 재계 노동계 등 국민이 힘을 모아 줄 일만 남았다는 것이 대통령의 인식인 듯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경제주체들이 서로 양보하고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것만으로 개혁과제 추진과 경제 살리기를 위한 실질적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국민의 협조는 일방적 당부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정책목표를 설득하고, 다방(多方) 소통을 통해 조정과 타협을 이끌어내는 어렵고 피곤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대통령의 진정성은 자기희생과 솔선수범, 솔직한 자기반성 위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고,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독일의 노동개혁은 정부가 밀어붙여 성공한 것처럼 들리지만 좌파 정부가 자신들의 지지층인 노동계를 상대로 고통분담을 호소해 이루어냈다. 야당이 노조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내년 총선을 앞둔 데다 국회 선진화법이 버티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본받기 힘든 모델이다.
노동개혁과 씨름중인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노동계 희생을 요구하기에 앞서 공공부문 개혁이라는 제 살부터 깎았고, 야당인 노동당 의원모임에 나가 개혁의 필요성을 직접 설파해 “소통과 설득으로 영국 개조를 추진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대국민담화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엔 담화문만 썰렁하게 걸려 있는 등 당․정․청이 합심해서 개혁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다는 절박감은 읽을 수가 없다. 대통령과 여당지도부는 여전히 물위에 기름 돌듯하고, 장관들과의 소통을 늘린답시고 기획한 국무회의 직전 티타임도 일회성 이벤트에 그친 인상이다. 청계천 고가도로 철거 과정에서 주변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발로 뛰었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일화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집권 2년 반이 지나도록 남북과 한·일 관계 어느 하나 풀린 게 없고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신뢰외교’는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는 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못마땅해도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받아들이고 선제적․전략적으로 대응하는 유연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통일대박론,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은 공허한 수사(修辭)에 그치고 만다.
남북 교류가 꽉 막힌 상황에서 이희호 여사의 방북은 대화의 물꼬로 활용할 법도 했지만 ‘속 좁은 대응’으로 기회를 날려버렸다. 일본 아베총리가 이달 중 북한 전격 방문을 추진한다는 보도들이 이런 답답함을 더한다.
내치도 외교도 자신만의 ‘원칙의 틀’에서 벗어나 발상을 바꾸고 확 트인 소통으로 집권 후반기를 열어야한다. 광복 70년·분단 70년에 즈음한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