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어수문
[차길진 칼럼] 창덕궁에서 야망을 펼치다
인사동에서 서울대병원으로 가는 길. 그곳에 창덕궁이 있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복궁 동쪽에 있다하여 동궐로 불렸던 창덕궁은 2005년에 완공 600년을 맞았다. 청와대가 있는 효자동부터 창덕궁이 있는 종로구 와룡동까지, 다소 먼 거리지만 조선의 왕과 대한민국 대통령이 살았던 동네 면면을 살피려면 피할 수 없는 코스다.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지만 2백년 남짓 제 기능을 발휘했을 뿐, 임진왜란 후부터는 창덕궁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절정이 세종대왕 시대였다면, 창덕궁은 정조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진경시대를 활짝 연 정조의 꿈과 야망이 살아 숨 쉬는 궁. 한국 궁궐 건축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정식 등록된 창덕궁은 아시아 맹주 자리를 가슴에 품었던 정조의 작전지휘본부였다. 창덕궁은 태종(1405년) 때 지어졌으나 이궁 역할만 해오다, 정조가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뒤 창덕궁의 하이라이트인 부용지, 부용정, 왕실도서관 규장각이 있는 주합루를 세우면서 그 위상이 달라진다. 정조는 이곳 부용정에 앉아 주합루를 바라보며 강대국 조선을 설계할 야심에 부풀어 있었다.
일찍이 나는 정조에게 관심이 많았다. 정조는 열한 살에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했고, 나 역시 열한 살에 공주 금강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뵈었다. 어린 시절 늘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나이에 맞지 않게 주역에 빠져든 것 등, 비슷한 점이 많아 평소 정조 행적을 자주 찾아보곤 했었다.
그러던 중, 2005년 2월 일본 삿포로 눈 축제에 초청받은 나는 뜻밖에 개막식을 장식할 대형 얼음조각이 '수원 화성'임을 알고 놀랐다. 매년 삿포로 눈 축제는 세계 각국의 대표적 조형물을 개막식 작품으로 조형하는데, 하필 내가 초청받은 그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이 선정된 것이다. 눈 축제 오프닝 테이프를 끊으며 수원 화성 얼음 건축조형물 앞에서 정조의 꿈과 회한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야심작이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3년 만에 당쟁으로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조선 최고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이장한 뒤, 이를 중심으로 한양을 대치할 신도시 건설계획을 세운다. 그 시작이 바로 화성축조였다. 그러나 정조는 화성을 중심으로 한 개혁의지를 드높이지 못한 채 49세의 나이로 급사한다. 정조의 붕어이후 계속된 독살의혹. 그것은 현재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 진경시대를 전공한 학자가 내게 정조의 독살 의혹에 대해 거론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너무 위대한 왕이셨기에 말하기 전 두려움이 앞섰던 것. 그러다 청한 분의 간곡한 부탁으로 할 수 없이 염사를 통해 본 결과 정조대왕의 독살의혹을 밝히고 말았다.
정조는 평생 북벌을 외쳤던 효종과 많은 점이 닮아있었다. 활쏘기로 체력을 단련했을 뿐 아니라 인재등용방식까지 닮았었다. 당시 효종은 아버지인 인조를 옹립했던 낙당의 김자점 일파를 역모로 처단하고 초야에 묻혀있던 옛 스승인 우암 송시열이 이끄는 산당을 대거 기용한다. 그리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구체화시켜나갔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효종은 붕어 직전, 아끼는 신료들과 함께 다가오는 봄을 노래하는 자리에서 북벌을 완수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두 달 후, 평소 앓아오던 종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수전증에 걸린 어의가 침을 잘못 놓는 바람에 소위 의료사고로 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