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곡(無等山曲)'이라는 노래가 있다.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에 성을 쌓아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기쁨을 표현한 백제(百濟)의 가요다. 노랫말과 악보는 전해지지 않지만 제목과 유래는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실려 있다. 악지는 '지리산가(智異山歌)' '선운산곡(禪雲山曲)' '방등산가(方等山歌)'와 함께 무등산곡을 언급했다. 은연중 무등산을 이 땅의 4대 명산 중 하나로 인정한 셈이다.
무등산 환벽당(環碧堂)에서 창계천(蒼溪川)을 따라 내려가다 마을로 접어들면 멋진 정자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취가정(醉歌亭)이다. 서른도 못 된 나이에 누명을 쓰고 죽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영웅 김덕령(金德齡) 장군 덕분에 세워진 정자다. 장군은 당대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弼)의 꿈에 나타나 한 맺힌 시 한 수를 읊었다. 권필의 영가(靈駕)는 “(김덕령의 꿈 속 음성이) 우는 듯 애절한 목소리였다”고 전했다. 권필의 '필'자를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역사는 모른다. '필(弼)'은 권필의 영가가 일러준 글자임을 밝힌다.
다시, 이 꿈이 김덕령의 후손에게 알려지면서 틀림없는 애가(哀歌)에 은유가 입혀지면서 '취가(醉歌)'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그 조상에 그 후손답다. 슬픔과 한의 시적 승화다. '패러독시컬 인텐션(paradoxical intention)', 즉 역설적 의도다. 예나 지금이나 무등산의 광주인은 용서에 인색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취가정에 걸려 있는 한시의 내용 역시 화해다. '忠貫日月(충성은 해와 달을 꿰고) 氣壯山河(기개는 산과 강을 덮었도다) 醉歌於地(취한 채 땅에서 부른 노래) 聲聞于天(감동해 하늘이 들었구나)'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무등산의 '고요 속의 외침'은 수박과 차(茶)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푸랭이 수박(무등산 수박), 증심사(證心寺) 주변의 춘설(春雪) 녹차와 홍차의 견줄 데 없는 맛과 향은 영계(靈界)의 위로다. 무등산과 광주가 흔들 수 없는 깊이를 과시하는 예향(藝鄕)으로 뿌리내린 것 또한 영계의 보상이다.
무등산은 본연의 문민(文民) 이미지를 회복했다. 달리 말해 사림(士林)이다. 무등산 사림정신의 핵심은 의(義)다. 무등산을 중심으로 광주, 담양(潭陽), 화순(和順), 광산(光山), 장성(長城)이 어깨동무를 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는 형국답다. '모든 기(氣)를 다스리며 엄청난 힘을 발산하는 한국의 단전(丹田)'이라고 무등산을 우러르는 것이 과장은 아니다.
김덕령의 '구국(救國) 유전자'는 무등산을 타고 고스란히 광주로 흘러들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광주 학생들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웠다. '굴욕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의기로 전국 청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무등산의 자궁 격인 전남도청과 금남로(錦南路)는 1980년 5·18의 격전지다. 금남로 광주일고의 광주학생운동 기념비, 무등산의 서쪽(광산)-남쪽(화순)-동쪽(담양)-북쪽(장성)을 거쳐 망월동(望月洞)의 5·18 묘역을 무심코 돌아보기만 해도 맑고 강한 정기를 흡입할 수 있다.
무등산과 광주는 영원한 청춘이다. 대한민국은 장년(壯年)이나 남북통일은 청년기에도 채 이르지 못했다. 통일행진에 뼈와 살을 붙여 강건한 청년으로 길러낼 산이 바로 무등산이다. 광주와 평양(平壤), 무등산과 모란봉(牡丹峰) 사이는 영기가 다리를 놓고 있다. 광주의 평화가 평양의 평화다. 광주와 평양이 두루 평화로우면 곧 통일이다. 용서하되 잊지 않는 무등산은 이제 통일전망대를 자임하며 북녘을 향해 평화의 기운을 뿜어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