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관료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였지만, 그 뒷모습을 보는 후배관료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용퇴(勇退)'.
하지만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이 세법개정안 발표준비 막바지에 접어든 세제실 안팎을 뒤덮고 있는 모습이다.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자리는 예산실장과 함께 기재부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최고의 1급 요직으로 꼽힌다. 차관급으로 한 단계 더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 11일 이른 명예퇴직을 선택한 문창용 전 세제실장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문 전 실장을 둘러싼 인사분위기가 밝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세제실 후배관료들 입장에서도 상당히 낯선 상황이 현실화된 것에 적잖이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용퇴, 그 이면의 이야기들
사실 지난해 11월부터 문 전 실장이 관세청장으로 영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총선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경제부총리 교체 이야기가 흘러나오던 시점이었다.
경제부총리가 교체되면 차관급 후속 인사가 있을 것이고 재임 1년을 훌쩍 넘긴 김낙회 전 관세청장이 교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했다. 이미 예산실장(송언석 현 기재부 2차관)이 차관급으로 올라섰다는 점에서(2015년 10월) 문 전 실장이 세제실장들의 '전통의 영전코스'인 관세청장으로 임명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예상이 대세였다.
이 예상은 지난 1월 유일호 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한 후 완전히 빗나갔다.
행시 29회 출신 최상목 현 기재부 1차관이 부임하는 등 일련의 인사가 단행됐지만 문 전 실장은 자리이동을 하지 않았다. 이후 1~2개월이 지나는 동안 문 전 실장의 거취와 관련된 이상한 소문들이 나기 시작했다.
이 미묘한 시기, 관세청에서 '대형사고'가 터지면서 관세청의 2인자 자리인 차장 자리가 공석이 됐다. 이를 둘러싸고 청와대 핵심 인사가 관세청장으로 내려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관세청 차장에 기재부 출신 인사(김종렬 현 관세청 차장)가 임명되고 뒤이어 관세청장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 고사했다는 이야기가 차츰 확산될 즈음, 관세청장에 1년 전 퇴직한 후 민간인으로 살아오던 천홍욱 현 관세청장이 전격 임명됐다.
문 전 실장의 관세청장 영전은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문 전 실장이 유 경제부총리 취임 이후 1~2차례, 사의를 표명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현재까지 자리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세청장 인선 이후 문 전 실장의 통계청장으로 영전할 것이다, 외부 유관기관장으로 내정됐다, 는 등 이런 저런 설들이 흘러나왔지만 결국 문 전 실장은 이를 모두 마다한 채 후배관료들과 조직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용퇴를 선택했다.
아쉬움보다 더 큰 '섭섭함'
기재부 관계자들은 아직 한참 일할 수 있는 인재(문 전 실장은 1962년 출생)가 어떤 이유에서건 조직을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 섞인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거취 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큰 내색도 하지 않고 세법개정안 준비 작업을 진두지휘한 문 전 실장의 모습이 오랫동안 귀감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아쉬움보다 그동안 쉽게 보이지 않았던 낯선 상황이 현실화된 것에 대한 섭섭함이 마음 속에 더 크게 남아있는 모습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문 전 실장의 거취와 관련해 그 동안 별의별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특히 누구의 라인에 속한 사람이어서 어디로든 영전히 힘들다, 는 둥 엉뚱한 소리들까지 나왔다. 본인의 마음고생이 굉장히 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세제실장을 했다고 꼭 영전하라는 법은 없지만,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납득하기가 다소 힘들다"라며 "문 전 실장의 용단은 박수받을 일이지만 세제실 입장에서는 일할 맛이 안나는 상황인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역대 세제실장 출신 중 차관급 영전을 하지 못한 케이스는 몇 번 있었다.
다만 이들의 경우 '수평이동'을 통해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지난 1990년 재무부 세제국에서 세제실로 격상된 이후 26년여 동안 세제실장을 거친 인물은 총 18명인데, 이들 중 8명이 관세청장직으로 이동했다. 비교적 최근(2008~2014년) 관세청장을 지낸 허용석, 윤영선, 주영섭, 백운찬, 김낙회 전 청장은 모두 세제실장 출신들이다.
차관급 영전이 아닌 수평이동 케이스는 지난 2003년 최경수 전 세제실장(중부지방국세청장 이동), 2005년 이종규 전 세제실장(국세심판원장 이동), 2008년 이희수 전 세제실장(IMF 상임이사 이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