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 구조조정이 호된 역풍을 맞고 있다. 채권단의 추가지원 거부로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난달 31일 이후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물류시장에 메가톤급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국적선사 1위, 세계 7위의 한진해운은 컨테이너선 97척, 전용 터미널 11개를 보유하고 세계 74개 노선을 운항 중이다.
이달 1일 법원의 개시 결정으로 법정관리 체제에 접어들면서 벌크선을 포함한 선박 141척 중 73척(5일 기준)이 19개 국가 항만에서 입·출항 금지 등으로 발이 묶여 있다. 북미 지역 해상 물동량 20%를 한진해운 배로 실어 날랐던 국내 수출업체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추수감사절을 앞둔 미국 소비업계는 미 정부에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등 파장은 글로벌화하고 있다.
한진해운이 해외 항만, 하역업체, 선주 등에 지불해야 할 미불금은 약 6500억 원에 달해 이를 즉시 해결하지 못하면 선박 압류와 입항거부로 선박 141척과 300여 선원들은 공해상에서 '바다의 노숙자'가 될 처지다.
'구조조정의 원칙을 지켰다'고 자화자찬하던 관료들은 물류대란에다 국가신인도까지 하락하는 등 후폭풍이 거세지자 9개 관계부처로 합동대책반을 꾸리고 범정부적 대응방안 마련에 부산하다.
정부가 해운업 구조조정 문제를 검토한 지 10개월이 됐다. 법정관리는 하나의 선택지였던 만큼 예상 가능한 피해 산출과 대응책을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정부는 그동안 “정상화 방안이 실패하더라도 시나리오별 대응책이 있다”며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 마련을 수차 자신해왔다. 그러나 막상 일이 터지자 대책은 고사하고 피해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해 허둥지둥하고 있다. 안이한 대처로 화를 키운 꼴이다.
정부와 산업은행이 조양호 회장과 치킨게임을 벌이는 것만 생각했지 수출입 기간망인 한진해운 붕괴가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과 대책에 대해선 준비한 게 전혀 없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한탄한다. 해운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무지, 해운업에 대한 총체적 이해 없이 금융논리로만 밀어붙인 결과라는 지탄도 쏟아진다.
한진해운은 유동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지난 4월 25일 자율협약을 신청했고, 5월 4일 이 신청이 받아들여지며 공식적으로 자율협약체제에 돌입했다. 용선료 협상이 사실상 마무리되고, 채권단 자율협약을 위한 조건이 충족되는 등 한 동안 한진해운의 경영 정상화 작업은 차질 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자율협약 조건과는 별개로 유동성 확보 규모에 대한 한진과 채권단의 생각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한진그룹은 자율협약 신청 당시 터미널 및 사옥 유동화 등을 통해 4112억 원을 마련하겠다는 자구안을 채권단 측에 제출했다.
반면 채권단은 7000억 원의 유동성 확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4월에 제출한 자구안에 불만을 품고 있던 채권단은 줄곧 추가 자구안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대주주 사재출연이 문제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사재출연 압박에 묵묵부답했다. 이것이 한진해운 좌초의 불쏘시개가 됐다.
이상기류를 감지한 한진그룹은 지난달 25일 내년 7월까지 한진해운의 유동성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에 한해 계열사 추가 지원 및 조 회장 사재출연을 통한 10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추가 자구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채권단은 조건부 지원이라는 점에서 추가 1000억 원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대주주로의 책임 있는 모습이 미흡했던 데다, 대규모 추가 지원에 나선다 해도 기업가치 제고보다는 채권자들의 채권상환에 쓰일 수밖에 없다”며 자율협약 종료를 선언했다. 자율협약 130일 만에 '대마(大馬)' 한진해운은 좌초됐다.
문제는 법정관리의 타이밍이다. 9월부터 11월까지는 한진해운이 강점인 아시아~북미 노선의 최대 성수기다. 9, 10월엔 아시아 명절, 11월엔 미국 추수감사절, 블랙프라이데이, 또 성탄절까지 이어지는 최대 쇼핑시즌이어서 가전이나 의류 같은 수출품 운송이 9월부터 본격화된다. 이 시기에 덜컹 법정관리 결정을 내리니 정부나 채권단이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현대상선 선박 13척을 긴급 투입해 후폭풍을 막는다고 하지만 현대상선 역시 채권단 관리를 받고 있어 앞날이 위태위태하다. 최근 글로벌 1위 해운사 덴마크 머스크가 주도하는 해운동맹에 가까스로 가입했지만 머스크가 갖고 있는 배가 650여척인데 반해 현대상선은 60척에 불과해 덩치를 키우지 않으면 대형사에 계속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다.
주요 선박 및 해외영업 네트워크, 핵심인력 등 한진해운의 알짜 자산만 현대상선이 인수토록 한다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해운업은 해운사 끼리 함께 화물을 수주해 노선별로 나눠싣고 다니기 때문에 글로벌 해운 네트워크가 생명이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존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잃는 것은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수출계약을 따내고도 운송편이 없어 물건을 못 팔아 물류대란이 수출대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진해운 법정관리 직후 해외 화주들 사이에서 “한국 정부가 제정신이냐”,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뱃길을 스스로 끊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아냥도 쏟아진다.
한진해운의 좌초로 '조선-해운-해운업 서비스'로 이어지는 산업의 선순환 고리가 깨졌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국은 조선 '빅3(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와 양대 국적선사(한진해운·현대상선), 해운서비스 기업으로 구성된, 해양산업 분야에서 모두 경쟁력을 갖춘 전 세계 유일한 국가인데 “구조조정 책임자 중에 이런 산업논리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한탄들이다.
법정관리가 내다보이는 데도 한진해운이 직전까지 화주들 물건을 실어 보내며 '대마불사론'에 매달린 것도 문제를 키웠다. 더 이상 무리한 지원이 불가능했다면 경영권을 빼앗아서라도 한국의 해운산업을 지킬 대타(代打)를 찾았어야 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단의 팔을 비틀고 때로는 시장에 읍소하며 '공직을 걸고서라도 산업을 살리겠다'는 열정적인 관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우조선 4조2천억 원 신속 지원을 결정한 청와대 서별관회의 논란 등으로 자칫 한진해운 지원에 앞장섰다 청문회에 설 수 있다는 우려로 관료들이 몸을 사리고, '아무도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데서 어이없는 참사가 빚어졌다.
이런 식이라면 해운업보다 더 파급효과가 큰 조선업을 비롯해 철강·화학 등 줄줄이 이어지는 산업 구조조정을 어떻게 해낼 것인지 실로 답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