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 회계법인이 국내에 지점을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입법 예고되어 내년부터는 회계시장이 전면개방 될 전망이다. 일부에서는 법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이지 미국의 대형회계법인이 이미 다양한 형태로 진출하였기에 이번 법안으로 인해 별로 달라질 바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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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 당시, 회계감사를 외국의 공인회계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의 회계시장은 극도의 불신을 받았다. 이후 회계투명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수준임을 부인할 수 없다.
증권시장에서 외국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어 막중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자본의 투자를 받아야 하는 대기업들은 외국의 회계법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국의 우수인력들은 전문가적인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여건과 함께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외국회계법인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국내 회계법인의 시장점유율이 하락하고, 역량이 하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위기론은 국민들에게 회계시장개방을 단지 밥그릇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가 있다. 또한 현안에만 얽매여 위기론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과할 소지가 있다.
위기의 근원은 제 역할 못한 우리 전문가
외국자본의 영향력이 크고, 한국의 젊은 회계사가 해외법인을 선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위기는 다른 데 있다.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혁신의 계기로 삼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건설회사들이 저가입찰로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벌이며 부실공사를 해왔던 것처럼 수조 원 규모의 회계감사 입찰에 2천만원 내외의 가격을 쓰면서 서로에게 ‘덤핑‘이라고 비난하며 부실감사를 양산하고 있다.
5,500억 규모의 국민은행, 1조원이 넘는 하이닉스의 회계부정사건 뿐만 아니라 최근 전 회계법인 대표가 로비창구 역할을 하다가 체포된 사건은 비리나 부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회계시장개방의 현실적인 위협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방을 계기로 외환위기 때 놓친 절호의 기회를 다시 살려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3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규제를 풀어야 한다.
정부는 문제를 규제일변도로 해결하려 한다. 빠르면 올 하반기부터 시행될 감사보수지정제도가 그 예다. 감사인을 배정받는 경우, 회계법인이 일반기업보다 비싼 감사보수를 요구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수도 정해주겠다는 것이다.
동일 회계법인에서 청구하는 보수의 타임레이트가 자유수임일 때와 배정일 때 큰 차이를 보이느냐로 판단해야 함에도 단순히 이전에 감사한 법인보다 높으면 이를 과잉청구라 판단한다. 이럴 경우 부실감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 소수의 기업을 대상으로 적정보수를 받으며 노력해 온 회계법인은 당혹스런 일을 당하게 되고, 저가덤핑으로 다량의 부실 감사를 해온 회계법인은 오히려 혜택을 입게 된다.
회계시장에 규제를 만들려면 한국의 회계시장이 나아가야 하는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정교한 설계를 할 필요가 있다.
감사서비스에 대한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감사서비스 질은 원만한 관계를 위해 회사의 뜻에 따라주는 것이고 이를 평가하는 것도 피감사회사가 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선 결코 외국자본의 불신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심리를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심리결과에 대해서는 투자가도 기업들도 알 수 있도록 전면 공개해야 한다. 현재 일부 벌점은 금융감독원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회계법인간 비교할 수 있는 벌점 누계현황은 확인할 수 없다. 벌점 현황을 공개하면 공인회계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는 오히려 회계시장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일각에선 감사하는 회사의 수가 많은 회계법인의 벌점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수많은 제품을 만드니까 몇 개의 불량은 당연하다고 말하거나, 서울아산병원이 제일 많은 환자를 보니까 의료사고가 많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것을 할수록 품질은 좋아야 정상이다.
엄정하고 균형 잡힌 징계가 필요하다.
처벌은 잘못에 대한 대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으로 반복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효과가 없다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분식이 적발되었을 때 대부분의 경우 실무를 담당한 공인회계사를 처벌한다. 이에 반해 회계법인은 별 영향이 없다. 직접적인 경제적 손실인 과징금 제도는 SK글로벌 분식회계와 관련하여 영화회계법인이 3억 5000만원, 하이닉스 분식회계와 관련하여 7억 7000만원 부과된 것이 전부이다. 수임료나 분식규모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수준이다.
1600개 이상의 감사대상회사를 가진 A회계법인의 경우 2001년 4월 이후 3년간 30차례 걸쳐 받은 벌점이 600점에 이르지만 업무정지 혹은 등록 취소 기준인 4,000점을 넘지 않아서 별 무리 없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는 한 번의 제재당 평균 20점의 벌점을 받는다고 할 때 200회의 분식을 허용하는 셈이다. 벌점제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면죄부에 가깝다.
한두 명의 희생양으로 잘못을 회피하고,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낮은 제도 하에서는 회계법인이 분식을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
세 가지 방안은 회계시장의 운영 실태를 세밀히 살펴 보완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정책당국이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회계시장의 주인공인 전문가들의 의지가 없으면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저가의 출혈경쟁, 인간관계를 이용한 계약, 다음 감사나 컨설팅을 위한 감사의견 제시 등이 누적되어 오늘의 위기를 만든 것이다. 우리가 만든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한다. 5년, 7년 지나서 또 이런 논의가 없도록 각자가 자신이 선 자리에서 공정경쟁, 공정감사를 위해 노력할 때다. 이것이 바로 회계시장개방의 위기에서 벗어날 첫 출발이다.
안근용 공인회계사
